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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유가 말했습니다. "땅이 부는 퉁소 소리란 결국 여러 구멍에서 나는 소리군요. 사람이 부는 퉁소 소리는 대나무 퉁소에서 나는 소리인데,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란 무엇입니까?"

자기가 대답했습니다. "온갖 것에 바람을 모두 다르게 불어넣으니 제 특유한 소리를 내는 것이지. 모두 제 소리를 내고 있다고 하지만, 과연 그 소리가 나게 하는 건 누구겠느냐?"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는 결국, 땅이 부는 퉁소 소리와 사람이 부는 퉁소 소리를 나게 해주는 땅의 구멍과 대나무의 구멍을 통과하는, 이 모든 공간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바람같은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이를 통해 장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가 땅의 구멍을 통과하여 "땅이 부는 퉁소 소리"가 되고, 대나무의 구멍을 통과하여 "사람이 부는 퉁소 소리"가 되듯이 모두 제각각의 소리같지만, 사실 그 근본에는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는 모든 소리들을 꿰뚫는 단 하나의 소리이면서도, 어떤 구멍을 통과하느냐에 따라 제각각 다르게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제각각의 소리만 들을 줄 알고, 그 바탕의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는 들을 줄 모른다. "나"를 덮고 있는 분별들을 떨쳐내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될 때,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4. 잠잘 때는 꿈으로 뒤숭숭하고, 깨어 있을 때는 감각기관이 일을 시작하고.

 

한 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머릿속의 잡념들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온갖 잡다한 감정들을 말하고 있다.

 

5.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염려와 후회, 변덕과 고집, 아첨과 방자, 터놓음과 꾸밈. ... 우리 안에 밤낮으로 번갈아 나타나지만,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지. 이렇게 아침 저녁으로 (여러가지 마음의 변화가) 나타나기에 우리가 삶을 유지하는 것. 이런 것들이 없으면 내가 있을 수 없고, 내가 없으면 이런 것들이 나타날 턱이 없지. 이야말로 진실에 가까운 것이나 이런 변화가 나타나게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구나.

 

그러한 온갖 감정들을 느끼고 있는 것이 나인가? 그럼 나를 잃으면 그런 잡념들을 놓아버릴 수 있는 것이다. 호흡에 집중하며, 떠오르는 잡념에 대해 아무 감정을 가지지 말고 바라보라 하는 최근의 명상의 요점과 동일하다. 불교의 참선과도 유사하다.

 

6. 참주인이 분명히 있는데, 그 흔적을 잡을 수 없구나. 참주인이 작용하는 것은 믿을 만한데,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셈이지.  ... 우리가 그 실체를 알든 모르든 그 참모습에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다.

 

참모습...좋고 나쁨, 더 필요하고 불필요하고의 분별이 들어가지 않고 그냥 존재하는 그대로가 참모습인 것이다. 모두 인연따라 순리에 따라 그리 존재하는 것이므로.

 

7. 어차피 돔도 쇠하고 마음도 그러게 되고 마니 정말 애처롭기 그지없는 일 아니겠느냐?

 

몸도 마음도 참주인이 아니다.

 

9. 도는 자질구레한 이룸(成)에 가리고, 참말은 현란한 말장난에 가리었다. 그리하여 유가와 묵가가 시비를 다투어, 한 쪽에서 옳다 하면 다른 쪽에서 그르다 하고, 한 쪽에서 그르다 하면 다른 쪽에서 옳다 하는 것이다. 이들이 그르다 하는 것을 옳다 하고, 이들이 옳다 하는 것을 그르다 하려면, 무엇보다도 (이들의 옳고 그름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밝음(明)이 있어야 한다.

 

모두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들처럼 자기가 만져 본 일방적인 부분적인 단견(短見)을 내세워 서로 분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문제를 해결하려면 편견, 분별에서 벗어나 코끼리를 전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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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손 트는 것을 막는 약은 한 가지인데, 한 쪽은 그것으로 영주가 되고, 다른 쪽은 무명 빠는 일밖에 못했으니, 똑같은 것을 가지고 쓰기에 따라 이렇게 달라지는 게 아닌가? 자네는 어찌하여 다섯 섬들이 박으로 큰 술동을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워 놓고 즐길 생각을 못 하고, 깊이가 너무 얕아서 아무것도 담을 수 없다고만 걱정했단 말인가? 자네는 아직도 작은 (일만 생각하는) '쑥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네 그려.

 

혜자가 장자에게 다섯 섬들이 박이 물을 담았더니 너무 무겁고, 쪼개서 바가지를 만들었더니 깊이가 너무 얕아 쓸 수 없다고 한탄하자, 장자가 반론하는 내용이다. 옛말을 따르면 '쓸모없음의 더 큰 쓸모(無用之大用)'이라 할 수 있고, 현대 경영학에 따르면 '발상의 전환'이라 할 수 있겠다. 어떤 상식적인, 또는 우리를 옭아매는 관습 등에 얽매여 "박"을 물을 담거나 바가지로만 본다면, 큰 도구를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 장자는 그런 상식,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절대 자유이며, 그럴 경우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더 큰 지혜에 다다를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 같다. 

 

14.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큰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사람들이 가죽나무라 하네. 그 큰 줄기는 뒤틀리고 옹이가 가득해서 먹줄을 칠 수 없고, 작은 가지들은 꼬불꼬불해서 자를 댈 수 없을 정도지. 길가에 서 있지만 대목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네. 지금 자네의 말은 이처럼 크기만 하고 쓸모가 없어서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걸세"

장자가 말했습니다. " ... 이제 자네는 그 큰 나무가 쓸모 없다고 걱정하지 말고, 그것을 '아무것도 없는 고을' 넓은 들판에 심어 놓고 그 주위를 '하는 일 없이(無爲)' 배회하기도 하고, 그 밑에서 한가로이 낮잠이나 자게. 도끼에 찍힐 일도, 달리 해치는 자도 없을 걸세. 쓸모 없다고 괴로워하거나 슬퍼할 것이 없지 않은가?"

 

앞에 내용에서 이어져, 혜자는 장자에게 장자가 하는 말들이 너무 허황스러워서 쓸모가 없다고 반박한다. 역사에서 어떤 선구자들이 행동을 하거나 아이디어를 냈을 때 그들을 비웃던 주변 사람들을 생각나게 한다. 그런 혜자에게 장자는 다시 한번, "발상의 전환"을 권한다. 쓸모가 없으니, 목수에게 베일 걱정도 없고 얼마나 좋으냐고 말이다. 혜자가 무릎을 탁 치는 장면이 상상된다.^^

 

1편 소요유(逍遙遊 )를 다 읽었으며, 내일부터는 2편 제물론(齊物論)을 읽을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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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리는 한껏 날아야 겨우 느릅나무나 다목나무에 이를 뿐이고, 어떤 때는 거기에도 못 미쳐 땅에 내려 앉고 마는데, 구만리를 날아 남쪽으로 간다니." ... 매미나 새끼 비둘기 같은 미물이 어찌 이를 알 수 있겠습니까? 조금 아는 것(小知)으로 많이 아는 것(大知)를 헤아릴 수 없고, 짧은 삶(小年)으로 긴 삶(大年)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구자나 천재들은 그 성과가 증명되기 전에 일반인들로부터 핍박받고, 부적응자로 낙인찍히나 보다. 나무와 나무를 이동하는 매미나 새끼 비둘기가 구만리를 나는 붕鹏에 비해 안 좋다는 것이 아니고, 둘 사이에 어느 것이 좋고 나쁘다는 구별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다고 그것은 이상하거나 틀린 것이 아니다. 나의 현재 지식과 경험으로 알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항상 겸손하고, 나 자신의 본래 모습을 발현시키기 위해 힘써 노력해야 할 것이다.

 

7. 지인至人은 자신에 집착하지 않으며, 신인神人은 공적에 무관하고, 성인聖人은 명예를 탐내지 않습니다.

 

지인, 신인, 성인은 절대 자유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들이다. 일반인들은 자기자신에 집착하고, 공적에 목 매고, 명예를 탐내므로, 자기ego, 공적, 성공, 명예에 구속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10. 신인神人은 그의 덕으로 온갖 것과 어울려 하나가 된 것이오. 세상이 모두 평화를 바라는데, 무엇 때문에 구태여 노심초사하며 애쓸 필요가 있겠소?

 

신인神人은 '온갖 것과 하나가 된' 상태로 만물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물처럼 흐르듯 살기 때문에 구태여 나서서 뭘 한다고...자기를 과시하고, 공적을 치하하고, 명예로운 삶을 살려하고,,,설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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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도덕경에 이어, 오강남 선생님이 풀이하신 "장자"를 읽기로 결정하였다. 하루에 20페이지 정도씩 읽어 한달 내에 완독할 계획이다.

 

대학생 시절, 한자에 자신이 있었어서, 한문학과의 수업을 교양으로 많이 수강했었는데, 당시 수업에서도 "장자"의 구절들이 많이 나왔었고, 엄청난 스케일이었다는 기억이 지금도 흐릿하게 남아 있다. 또한 이전의 오강남 선생님이 풀이하신 도덕경을 너무 감명깊게 읽었기에, 장자 또한 얼마나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 기대된다.

 

노자와 장자를 도교를 대표하는 인물로 뽑는데, 노자의 "도덕경""장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머리말에서 이에 대해 설명한다.

 

노자가 도를 주로 생성 변화의 '근원'으로 파악하고 우리가 본받고 따라야 할 궁극적인 귀착점이라고 강조한 데 반하여, 장자는 도를 무궁한 생성 변화 그 자체로 파악하고, 근원으로 돌아가기보다는 그냥 그 변화에 몸을 맡겨 함께 흐르거나 그대로 변하기를 더욱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도덕경』은 주로 도의 '생(生)'하는 측면을 말하였는데, 『장자』는 도의 '화(化)'하는 기능을 부각한다.

 

내편 제 1편 소요유(逍遙遊)

"절대자유"의 경지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변화"와 "초월"에 대해 이야기 한다.

 

1. 북쪽 깊은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곤(鲲)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크기가 몇 천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이름을 붕(鵬)이라 하였습니다.

 

"바다 기운이 움직여 물결이 흉흉해지"거나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그것을 타고" 날듯이 모두 자연 안에서, 그것에 순응하고 힘입어, 가능했다는 것이다. 초자연이 작용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생래적 가능성이 자연스럽게 발현해서 생긴 일임을 말한 셈이다.

 

뽐내려 높이 날려고 한 것이 아니라, 원래 자신 안의 특성을 따라 큰 날개를 띄우기 위해, 자연에 따라 회오리 바람이 불 때 큰 바람을 타고 높이 난 것이다. 인위적인 것이 아닌, 자연에 대한 순응이라는 뜻으로 다가온다. 또한 "화(化)"의 관점에서 곤鲲과 붕鵬이 원래 하나였음을, 따라서 자신 안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누구나 안에 자신만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니, 억지로 자기가 아닌 다른 모습을 따를 것이 아니라, 자연에 따라 자신 본연의 모습, 그것을 발현시키라는 말씀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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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여기 하얀 기둥이 있습니다.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붉은색 안경을 낀 사람은 기둥이 붉다고 믿습니다. 또 푸른색 안경을 낀 사람이라면 푸른색이라고 믿을 겁니다. 그 두사람이 만나면 서로 기둥이 빨간색이니 푸른색이니 하고 다툴게 뻔합니다. 이게 상을 짓고 상에 집착하는 중생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상에 집착하는 이유는 집착하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그것이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내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을 실제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누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 눈에 빨갛게 보이듯이 그의 눈에는 파랗게 보인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대립과 갈등을 피할 수 있습니다.

 

어렵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실제가 아니라 그저 보이는 상일 뿐이라니. 그리고 사람마다 다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처럼 상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자체가 '상을 내려 놓아야 한다'는 상을 하나 더 보태고 있다고 지적하고 계시다. 어렵다.

 

32.

내가 상대를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해준다는 상을 가지고 있으면 자꾸 그 대가를 바라게 되고, 바라는 그 마음이 채워지지 않으면 갈등이 생깁니다. 더군다나 상대가 원하는 걸 해주는 것도 아니고 자기 생각에 좋아 보이는 걸 해주면서 '내가 너를 위해 이렇게 애쓰고 있다'는 생각에 빠지면 갈등은 피하려야 피할 수가 없습니다. 내 보기에 좋은 것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심입니다.

 

이런 이치를 공부하고도 막상 일상에서는 눈에 보이는 모습에 집착하고, 귀에 들리는 소리에 집착하고, 코에 맡아지는 냄새에 집착하고, 혀에 닿는 맛에 집착하고, 손에 느껴지는 감촉에 집착하고, 머리로 인식되는 알음알이에 집착하는 게 현실입니다. 이제는 그만 '눈 뜨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꿈속에서 아무리 좋은 일이 있었더라도 눈을 떠 보면 다 꿈일 뿐입니다. 좋은 일도 다 꿈같은 줄 안다면 나쁜 일이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변 사람들과 부딪치는 자신을 돌이켜보고 순간순간 일어나는 내 마음을 관찰해야 합니다.

 

이렇게 금강경을 완독하였다.

8월 24일에 시작하여 한달이 조금 넘게 걸렸다.

불교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종교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 경전 안에는 철학 이상의 생각들이 많이 담겨 있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내용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도덕경을 먼저 시도하였는데, 두 책에서 말하는 내용이 상당히 유사하다. 도덕경도 금강경도 다른 분들께서 해석한 책들을 추가로 구입하였다. 도덕경은 서양의 시각으로 해석한 웨인 다이어의 해설 본을 구입하였고, 금강경은 도올 선생님의 해설 본을 추가로 구입하였다. 다시 여러 번 읽어 보고 싶고, 그래야만 더더욱 나를 갈고 닦고, 처음보다 더 많이 알 수 있을 것 같다.

 

좋은 책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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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물은 그릇의 모양에 따라 그 형태가 바뀝니다. 스스로 어떤 모양이 되겠다는 아무런 의지도 작용하지 않습니다. 또한 텅 비어 있는 그릇은 거기에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 그 인연에 조응해서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 되고 국을 담으면 국그릇이 됩니다. 그와 같이 여래는 모든 욕구를 여의었으니, 그 행은 물과 같고 그릇과 같은 무위의 행입니다.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으므로 행함없이 행하는 무소행無所行을 실천하고 무위의 모습으로 무주상보시를 행하여 무루복을 짓습니다.

 

그 뒤로 수행자들은 분소의를 빨아서 입게 되었습니다. 그냥은 더러워서 도저히 입을 수가 없어서 깨끗하게 빨아 입는 게 아니라 인연에 따라 쓰임이 더 적절하도록 빨아서 입기로 한 것입니다. 그처럼 '이래야 된다'라고 고집할 바가 없기에 분별이 끊어진 상태에서 인연따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집착하지 않고, 분별을 버리라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으라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다. 인연따라 순리에 따라 나를 흘러가게 끔 놓아두는 것이다.

 

화가 났을 땐 화난 대로, 슬플 때는 슬픈 대로, 거기에 빠져들지도 말고 거부하지도 말고 파도가 일어나는 모습을 바라보듯이 내 마음을 가만히 지켜보는 겁니다. 이런 마음이 일어나야 된다, 이런 마음은 일어나면 안 된다, 그런 관념을 내려놓고 '지금 이런 마음이 일어나는구나' 하고 지켜보면 마음의 움직임에 꺼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냥 나의 감정을 지켜보는 것이다. 감정에 반응하지 말고.

 

30.

모두 같은 것을 근본으로 하여 다른 것이 되며, 하나를 근본으로 해서 하나가 아닌 것이 나타나는 이치입니다. 근본 이치에서 본다면 본래 같은 것도 없고 다른 것도 없습니다. 지금 모습을 드러낸 인연에 따라 나타나는 이름일 뿐이지, 같거나 다르다고 할 만한 본질적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존재에서 서로 다른 많은 존재가 나오고, 서로 다른 많은 존재들이 모여서 하나의 세계를 이룹니다. 하나로부터 많은 것이 나오고 많은 것으로부터 하나가 나옵니다. 하나는 하나 아닌 것으로 돌아가고, 모든 것은 모든 것이 아닌 것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다, 둘이다 하는 구분은 다만 지금 눈에 보이는 현상에 불과하며 궁극적으로 하나와 둘을 판단할 만한 실체는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보면 실체가 존재하는 것 같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아무 실체없이 텅 비었음을 알게 됩니다. 또 아무 실체없이 텅 비어 잇는 것처럼 보이는 거기로부터 온갖 현상이 모습을 드러냄을 알게 됩니다. 티끌은 주변 세계와의 연관속에서 그때그때 다른 성질을 드러내기도 하고 전혀 새로운 물질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 속을 보면 텅...비어 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는 욕심, 집착, 감정을 느끼고 번뇌한다.

 

내가 지금 세상을 보는 관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집니다. 주변 조건에 매달려서 사느냐, 아니면 내가 처한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사느냐의 선택은 순전히 자신의 몫입니다. 늘 나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나는 그대로 두고 밖을 바꾸겠다고 하면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어떻게 반응할지, 어떻게 대처할지, 모든 것은 내가 결정할 수 있고, 나에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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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보살은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김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이웃사람이 곡식을 나눠달라고 찾아오면 망설이지 않고 내줍니다. 보살은 이 세상 모든 존재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어서 누구든 필요한 사람이 쓰는 게 당연하다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기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세상 만물이 다 그것으로 숨을 쉬며 살아가고, 태양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세상 만물이 다 그 온기에 의지해서 살아갑니다.

또 보살의 농사는 수확에만 매달리지 않습니다. 수확만 바라보는 사람은 수확에 이르는 과정이 참아내야 할 인고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보살은 농사짓는 그 과정이 모두 즐거움이므로 순간순간을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거둬들인 수확은 이미 삶의 즐거움을 누리고 남은 찌꺼기일 뿐입니다. 그러니 누가 필요하다고 하면 기꺼이 나눠줍니다.

인생도 등산과 같습니다. 좋은 것도 내 인생이고 나쁜 것도 내 인생입니다. 바라는 대로 되는 것도 내 인생이고,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것도 내 인생입니다. 그처럼 나의 모든 시간이 소중한 내 인생의 일부임을 알고, 순간순간 기쁨을 누리며 사는 지혜가 나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듭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생각났다. 그는 독실한 불교신자였고, '인간의 삶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큰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고 말하였다. 실제로 그의 삶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그저 받아들이며 나아갈 뿐이었다.

 

갓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엄마의 마음도 보살의 마음과 같습니다. 바라는 마음 없이 베푸는 보살의 마음입니다. 엄마라면 누구나 그런 마음을 냅니다. 그 마음을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닙니다. 이렇듯 엄마가 보살의 마음을 가지는 이유는 아이와 엄마가 본래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고 네가 나인 두 사람 사이에는 내가 너를 보살핀다고 생색내는 마음, 내 공덕을 알아달라는 마음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습니다. 이렇게 일체중생이 다 한몸인 줄 알면 복을 짓고도 받을 복이 없는 보살의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게 됩니다.

 

도덕경 역시, 만물이 보이지 않는 道에서 시작되었고, 道로 이어진 하나라고 말한다. 우리는 다 이어져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다. 라는 말을 많은 책에서 보아 왔는데, 가장 와닿는 비유다. 엄마와 아기. 본래 하나이기때문에, 무주상보시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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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상에 집착해 실상을 보지 못하고 진실을 듣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는 사람의 말일지라도 그 속에서 진리를 들을 수 있고, 세상 모두가 우러러보는 사람의 말일지라도 그릇된 견해일 수 있습니다. 공부하는 수행자라면 모름지기 이 점을 놓치지 말고 바르게 판단하는 안목을 키워야 합니다.

돌이켜 보면, 나보다 아랫사람,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의 현 상황에 대해 조언을 하거나, 태클을 걸 때면, 그게 옳은 말이라고 머리로 생각하면서도 괜히 기분이 나빠져서 더 화내고 일부러 더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있었다. 상에 집착하지 않았다면, 좀 더 나은 길로 가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욕심이 아니라 원願을 품은 사람은 바라는 바를 이루려고 노력하되 괴로움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이루고자 하는 것이 실패했을 때 낙담하지 않고 다시 노력하고, 또 안되면 다른 방법으로 노력하고, 다만 그렇게 계속할 뿐입니다. 그러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이라는 판단이 서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툭툭 털고 다른 일을 합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누린 즐거움과 행복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이 아닌 욕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형상에 집착합니다. 또 그럴수록 깨달음의 길은 점점 더 멀어집니다.

 

욕심과 원의 차이.. 잘 모르겠다. 그래도 그 자세의 차이만은 알 것 같다.

 

27.

부와 명예와 가족과 친구는 고통의 원인도 아니고 행복의 원인도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늘 그 속을 헤매며 한 극단과 다른 극단을 왔다갔다합니다. 행복의 원인이라고 했다가 그게 잘 안되면 고통의 원인이라고 했다가, 그렇게 평생을 헤매며 삽니다. 이것이라는 상이든 이것이 아니라는 상이든, 그렇게 그 속을 오락가락해서는 인생의 괴로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일체 법이 무아'라는 것과 '일체 법이 없다'는 것은 그 뜻이 전혀 다릅니다. 그 둘을 혼동해선 안 됩니다. 우리가 약이라고 부르는 물질은 실은 그 안에 약이라는 실체나 근원이 있지는 않습니다. 약이라는 실체가 없다는 것은 이것이 독이라는 뜻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도 아닙니다.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영원불멸하는 고정된 성품이나 역할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정한 조건과 인연 속에서 때로는 약성으로 작용하고 때로는 독성으로 작용하는 것이 참 모습입니다. 다만 지금 여기에서의 쓰임에 따라 약이라 불릴 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와 현상은 '이것'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동시에, 놓인 상황과 인연에 딸서는 '이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만 '이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정한 조건과 인연 속에서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 작용하고 이름지어질 뿐, 그 이름에는 고정된 성품이나 역할이 없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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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태양이 온 세상을 비추어 살리듯이, 물이 만물의 생명을 북돋우듯이, 공기가 생명을 숨쉬게 하듯이, 중생을 교화하되 교화한다는 생각이 없는 행,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한다는 생각이 없는 행이 무위의 행, 함이 없는 행입니다.

 

부처님께서 말하는 무주상보시라는 것이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하는 무위와 유사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이 세상에 저절로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단지 내가 그 일의 원인을 모를 뿐입니다. 모든 일은 신의 뜻도 아니고 전생 때문도 아니고 우연히 일어난 일도 아닙니다. 그러니 내가 처한 상황이나 사건이 나와 관련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내가 마땅히 겪어야 하는 일이라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공부의 시작입니다.

 

모든 것은 다 순리에 따라 흐르고 일어나니, 순리에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가?

 

마음 속에 바람이 불지 않도록 정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내 자신을 차분히 관찰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고요히 살펴보면 순간순간 무수한 마음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화가 나고 미움이 일어나고 슬픔이 생기는 내 마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화를 내며 괴로워하는 사람은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 화의 책임이 어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내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화는 왜 일어날까요? 화는 내가 옳고 네가 틀렸다는 생각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옳고 그름을 가르는 이유는 사사건건 매사를 분별하는 습관때문입니다. 입으로는 객관을 주장하지만 사실은 항상 내 생각과 내 취향과 내 기준에 따라 분별합니다. 이런 주관적인 옳고 그름의 분별이 생기면 그 분별에 따라 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화가 나는 이유가 내가 옳다는 생각에 있는 줄을 알고, 그 분별의 기준이 공한 줄을 알면 어리석은 인연의 씨앗을 뿌리는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상대가 아무리 날카로운 말을 하고 어떤 경계가 온다 해도 내가 상을 버려 허공처럼 텅 비어 있다면 상처받을 일이 없습니다.

 

허공처럼 텅 비어 있다면....깊은 울림을 주는 구절이다.

 

나를 비워서 인을 없앤다면 어떤 연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선연善緣이라면 증강시키고, 악연惡緣이라면 순화시킵니다. 그렇게 내 씨앗을 고쳐낙는 것이 수행의 요체고, 이런 수행은 주변 사람들을 모두 행복하게 합니다. 내가 행복해지는 길과 네가 행복해지는 길이 둘로 나뉘지 않고 한 길에 놓여 있습니다.

 

주변을 행복하게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플러스의 기운을 주게하는 사람이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그 분의 말씀이 떠올랐다.

 

벽에 부딪친 공은 반드시 튀어나오기 마련이고, 그 이치를 아는 사람은 공이 튀어 돌아온다는 사실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결과가 지금 즉시 나타나지 않는다해도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기에 의연한 태도로 결과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과보가 있느냐 없느냐, 오늘 오느냐 내일 오느냐 전전긍긍하지 않습니다.

 

의연함, 일희일비하지 않는 자세를 갖고 싶은데, 여기에 답이 있는 것 같다. 인연과因緣果를 안다면, 초연해질 수 있는 것이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는 도덕경의 구절이 떠올랐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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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금강경 사구게

제5 여리실견분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

제10 장엄정토분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

제26 법신비상분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

제32 응화비진분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

 

이 사구게가 전하는 말씀은 모두 한가지입니다. 모든 상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상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비로소 세상의 참모습을 보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어젯밤 꿈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더라도 한순간 눈을 번쩍 떠서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면 고통은 사라집니다. 모두 꿈이었으니 괴로워할 일이란 본래 없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모든 상이 공함을 알면 그만입니다.

 

제법이 공함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한없이 무거웠던 등짐도 눈을 뜬 뒤에는 조금도 나를 힘들게 하지 못합니다. 아니, 그 짐은 본래 짐이 아니었음을 보게 됩니다. 학벌이 낮다, 병이 들었다, 이혼을 했다, 자식이 없다, 아기를 못 낳는다, 사업에 실패했다, 실직을 했다, 어떤 일도 다 그렇습니다. 눈곱만큼도 나를 괴롭힐 수 없고, 눈곱만큼도 나를 더럽힐 수 없고, 눈곱만큼도 나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내 삶에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내 삶에 흠집이 되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내 모습과 처지와 조건을 바꾸어서가 아니라 지금 이 모습 이 조건 그대로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해탈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집착을 버리라는 것, 집착하지 말라는 것은 도덕경에서 말하는 무위와 비슷한 것 같다. 집착과 작위는 다 내 생각이 만들어 낸 것. 집착, 작위에 의한 행동을 버릴 때, 순리의 흐름에 따라 무엇에도 거침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어떤 것도 나를 가두어둘 수 없는 해탈, 대자연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다만, 어떻게 하면 생각을 멈추고 집착과 작위를 짓지 않을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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