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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장.

훌륭한 무사는 무용을 내보이지 않습니다. 훌륭한 전사는 성내지 않습니다.

훌륭한 승리자는 대적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고용인은 스스로를 낮춥니다.

 

훌륭한 무사는 무용을 인위적으로 뽐내지 않고도 상대방을 이기고, 훌륭한 전사는 인위적으로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상대방을 이기며, 훌륭한 승리자는 인위적으로 경쟁하지 않고 상대방을 이기며, 훌륭한 고용인은 지배하려하지 않고 스스로를 낮추어 통치를 한다. 도는 인위나 작위없이 자신의 목적을 쟁취하는데, 그것은 모든 것이 원래 하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네가 이기는 것이 곧 내가 이기는 것이므로 인위적인 행동이 필요하지 않다.

 

69장.

내 편에서 주인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손님노릇을 하고, 한치 전진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한자정도 물러서라는 것입니다.

이를 일러 나아감이 없이 나아감, 팔이 없이 소매를 걷음, 적이 없이 쳐부숨, 무기없이 무기잡음이라 합니다.

 

인위나 작위 없이 자신의 목적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물처럼 자신을 낮추고, 자애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존중하는 것이다. 이기는 쪽에서 슬퍼하는 이유는 상대방과 내가 원래 하나이므로, 상대방이 졌다는 것은 나 또한 잃은 것이 있다는 뜻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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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보시를 행하되 집착없이, 머문 바 없이 하라.

 

상대에게 기대를 많이 하면 할수록 상대가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내 마음이 춤출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 사이의 갈등은 이해관계와 그로 말미암은 기대감 때문에 생깁니다.

 

상대에게 베푸는 것으로 내 할 일은 모두 끝났다는 마음, 베풀었다는 생각마저 없이 행하는 보시는 내가 행복해지는 길이며 번뇌를 소멸하는 길입니다.

 

빚을 갚는 사람과 같은 자세가 바로 무주상보시의 마음입니다. 마치 빚갚는 마음으로 '원래 당신 것이니 도로 가져가시오'하는 마음으로 베풀 때, 양보했다는 상을 버리고 양보할 때, 비로소 상대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해집니다.

 

남의 도움을 받는 사람은 그만큼 종속된 삶을 살게 됩니다.

 

원래 당신 것이니, 도로 가져가시오.. 원래 다 하나이니,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것은 내가 도움이 필요한 것이고,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돕는 것은 나를 돕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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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생은 자기 뜻대로 일이 되지 않으면 괴로워합니다. 남편이 돈을 못 벌어서, 자식이 공부를 못해서, 부모가 이혼을 해서, 친구가 배신을 해서 등등 갖가지 이유를 대며 괴로워 합니다. 이는 세상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괴롭다는 뜻이지요. 내가 괴로운 이유가 하나같이 다 다른 사람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나보다 힘이 센 존재,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단번에 해결해 줄 수 있는 존재, 즉 신이라는 존재에 매달려 제 뜻을 이루게 해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머리가 쿵! 했다. "내가 괴로운 이유가 하나같이 다 다른사람 때문"...그렇네...왜 그래야 하는거지? 나는 나인데, 왜 나의 괴로움은 항상 내가 아닌 밖에서 오는 것일까.

 

나의 괴로움이 남편이 술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자기 생각'에 집착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게 문제 해결의 핵심입니다. 남편이 술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그 마음만 놓아버리면 남편이 술을 더 먹는다고 해서 실망할 것도 없고 덜 먹는다고 해서 좋아할 것도 없습니다.

 

'술이 보약'이라는 말은 남편을 나한테 맞춰 바꾸려 하지 말고 남편 입장에서 그를 대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이 술상을 차려주는 일로 표현되는 것이고, 그렇게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가 행복하고 기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한 공덕은 내 마음을 바꿈으로써 이미 다 받았습니다. '내가 남편을 구제했다'든가 '남편은 아직 구제되지 않았다'는 생각은 여전히 상대에게 내 삶을 얽어매 놓고 종속시키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생각은 언제든 또 다른 괴로움을 불러옵니다.

 

흔히 뱀을 보고 징그럽다 하고 돼지를 보고 더럽다고 하지만 실제로 뱀이나 돼지가 그런 성질을 가진 건 아닙니다. 내가 한 생각을 일으켜 그런 식으로 고정관념을 만들어놓고 마치 그 존재가 그런 것인 양 착각하는 것입니다.

 

나와 너를 경계짓는 마음만 사라진다면 세계는 있는 그대로 하나입니다. 본래 경계가 없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을 울리는 문구가 너무 많아 인용이 대부분이며, 내가 느끼는 바를 말로 표현하기에는 본 내용이 너무나 크고, 또 감히 그러할 수도 없다. 세계는 있는 그대로 하나이며, 본래 경계가 없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지금 같이 읽고 있는 도덕경에서 노자가 말씀하시는 바와 많이 유사한 것 같다. 다만, 노자는 그러한 도를 통해 통치하여, 세상을 순리대로 흘러하게 하라하며, 부처께서는 더 많은 중생을 구제하라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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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금강경에 그려진 부처님의 행색은 마치 거지에 불과합니다. 다 떨어진 옷을 입은 채 발우 한 개 들고 이 집 저 집 밥을 동냥하는 부처님, 제자들과 함께 얻어 온 밥을 나눠 먹는 부처님, 식사를 마치고는 손수 가사와 발우를 정리하는 부처님. 이렇게 부처님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 부분을 읽을 때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가 "고타마"를 처음 보았을 때 묘사한 구절이 생각났다. 공양을 얻기 위해 수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걸어가는 평범한 모습이었는데, 싯다르타는 그 모습안에서 그분이 "고타마"임을 한번에 알아챘다. 부처님께서 이러한 지극한 평범한 속에서 깨달은 자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평범 속에서 부처님께서 말하려 하는 것은 무엇일까.

순간순간 바뀌는 마음의 변화는 모두 눈, 귀, 코, 혀, 몸, 뜻의 육근이 경계에 따라 일어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코로 맡는 냄새, 입으로 느끼는 맛, 손으로 느끼는 감촉, 머리에 일으키는 생각에 따라 순간순간 좋고 싫음을 구분합니다.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해선 매순간 변하는 감각에 의지한 좋고싫음에 대한 구분을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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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장.

강과 바다가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 낮추기를 잘하기 때문입니다.

백성위에 있고자 하면 말에서 스스로를 낮추어야 하고, 백성 앞에 서고자 하면 스스로 몸을 뒤에 두어야 합니다.


겸손은 수단이나 목적이 될 수 없고 누가 겸손해지고 싶다 하여 겸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물이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 그 본성 때문이지, 어떤 외부적 목적을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애쓰는 것이 아니듯 말이다. 오강남 선생님은 이렇게 아무런 사심이 없이 진정으로 자기를 낮추면 ‘결과적으로’ 자연히 위에 오르게 되고, 진심으로 자기를 뒷자리에 놓으면 ‘결과적으로’ 자연히 앞에 앉게 된다고 말씀하고 계시다.


67장.

세상 모든 사람 이르기를 나의 도는 크지만 쓸모 없는 듯하다고 합니다. 크기 때문에 쓸모없는 듯한 것입니다. 만약 쓸모있었으면 오래전에 작게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내게 세가지 보물이 있어 이를 지니고 보존합니다. 첫째는 자애, 둘째는 검약, 셋째는 세상에 앞서려 하지않음 입니다.


큰 도는 너무 커서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엔 오히려 쓸모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런 도의 기본 원리로 자애, 검약, 세상에 앞서려 하지않음의 세 가지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언제나 처럼 상반되어 보이는 개념을 이어서 말씀하신다. 자애때문에 용감해질 수 있고 검약때문에 널리 베풀 수 있고 세상에 앞서려 하지 않기 때문에 큰 그릇들의 으뜸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누구보다 용감하므로 자애로울 수 있고, 누구보다 널리 베풀 수 있기 때문에 검소한 것이며, 누구보다 앞 설수 있으므로 겸허히 누구보다 뒤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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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장.

함이 없는 함을 실천하고, 일함이 없는 일을 실행하고, 맛없는 맛을 맛보십시오.

큰 것을 작은 것으로 여기고, 많은 것을 적은 것으로 생각하십시오. 원한을 덕으로 갚으십시오.

 

계속하여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개념들은 "도"의 세계에서는 하나이다. 그러니 큰 것을 작은 것으로 여기고, 많은 것을 적은 것으로 여기라고 하는 것 같다. 좀 더 실생활에 적용하면, 큰 일도 작은 일들로 이루어져 있고, 작은 일이 큰 일이 되는 것이므로, 작은 일부터 하나하나 신중치 처리하면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말 같다. 또 큰 일을 작은 일로 보고, 작은 일일때부터 하므로, 큰 일을 쉽게 이루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은 작은 일도 작게 보지 않고, 어렵게 여기고 크게 보는 것이다.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 원한이 어찌보면 원한이 아니고 은혜일 수 있고, 어찌보면 덕으로 갚는 것이 진정한 복수일 수 있고...노자의 큰 그릇에 감탄하게 된다.

 

64장.

억지로 하는 자 실패하기 마련이고, 집착하는 자 잃을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성인은 하지 않음으로 실패하는 일이 없고, 집착하지 않음으로 잃는 일이 없습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자연스런 이치를 까먹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처음부터 대단한 결과를 노린다거나, 그러한 이유로 거대한 계획을 세워 처음부터 미루고, 실패한다거나....ㅜㅜ 도에 따라 살면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억지로 하는 자 실패하기 마련이고, 집착하는 자 잃을 수 밖에 없다. 분수에 맞지 않는 목표를 세우고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순리에 맞지 않아 실패하고 잃을 수 밖에 없다. 순리에 따를 때, 마지막까지 평정심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인은 욕심을 없애려는 욕심만 있고, 온갖 것의 본래적인 자연스러움을 도와 줄뿐 억지로 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65장.

옛날 도를 잘 실천하던 사람은 사람을 총명하게 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어리석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을 다스리기가 어려운 것은 아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강남 선생님은 일단 이 장이 말하는 바가, 독재정치의 우민화와는 다르다고 주의하고 있다. 독재야 말로 가장 인위적인 것이므로. 내 생각에는 순리에 따라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욕망적, 인위적 지혜들을 멀리하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 놓은 제도들이 최조 제정 취지와는 다르게 시간이 지날 수록 변질되는 경우 들을 경계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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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부터 금강경 30일 완독을 목표로 매일 읽기를 시작한다.

 

책은 법륜 스님의 "금강경 강의


 

 

금강경은 흔히 다이아몬드, 금강석처럼 단단한 경전이라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인도어로는 "바즈라", "벼락"의 뜻이라고 한다. 청천벽력 처럼 내려쳐서 인간의 모든 집착과 무지를 번개처럼 단칼에 내려 자르는 지혜라고 한다.

법륜 스님의 머리말처럼,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나는 얼마나 달라져 있을 것인지...

 

머리말에 인상적인 구절이 있다.


금강경은 생각이 그 어느 쪽으로도 고정되지 않게 하면서, 언어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 없는 살아 있는 깨달음을 듣는 이 스스로 체득하도록 하기 위해 말 아닌 말, 말을 넘어서는 말로써 언어적 한계를 뛰어넘었습니다. 이는 존재의 실상인 공에 대한 언어적 가르침을 넘어서려는 선종의 정신과도 흐름을 같이 합니다.

 

1. 법회인유분
하지만 앞으로는 수행자는 부자든 가난한 자든 가리지 말고 처음 탁발을 시작한 집에서부터 차례로 일곱번째 집까지만 밥을 비십시오. 모름지기 수행자는 분별을 내서는 안됩니다.


가난한 집에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생각이나 복을 짓도록 해주겠다는 생각 모두 우리 마음이 짓는 분별이다. 분별하지 않을 것. 상대방을 배려한 분별심이 오히려 더 상대방에게 배려가 아닐 수 있으므로. 게다가 누구에게든 분별을 버림으로써, 이 세상의 가장 높은 자보다 높고, 가장 낮은 자보다 낮은 이가 되어 일체중생이 평등함을 실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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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장.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조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작은 생선을 조리하는 데도 '그대로 놓아둠'이 이렇게 중요한데, 하물며 큰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야 두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순리에 따라 세상이 다스려지면,  귀신이든 성인이든 세상에 간섭할 일이 없게 된다.

61장.
큰 나라는 작은 나라 아래로 스스로를 낮춤으로 작은 나라를 얻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향해 내려감으로 큰 나라를 얻습니다.

이상적인 이야기지만, 국가 간 관계에 있어서의 도를 얘기하고 있다. 큰 나라든 작은 나라든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작은 나라를 큰 나라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한다. 큰 나라는 큰 나라이므로 굳이 무력을 쓸 필요없이 작은 나라를 존중함으로써 현재의 강소의 관계를 평화적으로 유지할 수 있고, 작은 나라는 작은 나라이므로 이기지 못할 싸움을 할 필요없이 큰 나라를 존중함으로써 현재의 불리한 관계에서 작은 자기 나라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강소의 관계가 영원한 것이 아니므로 크던 작던 자신을 낮추는 것만이 영원할 수 있는 길이다.

62장.
도는 모두의 아늑한 곳. 선한 사람에게도 보배요, 선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은신처입니다.

도의 만물에 대한 포용력을 말하고 있다. 무위의 세계에는 가치의 위계가 없고 다 동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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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장.

내가 억지로 일을하지 않으므로 백성이 저절로 바뀌고, 내가 고요를 좋아하므로 백성이 저절로 바르게 되고,

내가 일을 꾸미지 않으므로 백성이 저절로 부하게 되고, 내가 욕심을 내지 않으므로 백성이 저절로 통나무가 되도다.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ㅋㅋ 뭔가 조금이라도 부족하거나 사고가 발생하면 부처를 새로 만들고 팀을 새로 만들어서 사람을 늘리면 해결될거라고 생각하는 지도자들. 물론 나보다 더 경험도 많고, 내가 헤아리지 못한 뜻이 있겠지만.. 정말 이름만 들어도, 이런 부서가 왜있지? 무슨 일을 하는 거지? 라고 생각들 때가 많다. 무슨 일이 발생할 때 마다, 아무도 생각 못한 엄청난 해결책으로 돋보이게 해결해보려 하는...새로운 해결책을 찾으려는 시도보다, 그럴 때일 수록 기본업무, 기본 의무, 기본에 충실하라는 노자님의 혜안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경제위기는 늘 반복되고, 그리고 그 원인이 항상 인간의 욕심에 있음을 반추해보면, 정말 노자님의 말씀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58장.

언제나 옳은 것은 없습니다. 올바름이 변하여 이상스런 것이 되고, 선한 것이 변하여 사악한 것이 됩니다. 사람이 미혹되어도 실로 한참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모가 있으나 다치게 하지는 않고, 예리하나 잘라 내지는 않고, 곧으나 너무 뻗지는 않고, 빛나나 눈부시게 하지는 않습니다.

 

57장에 이어 무위의 다스림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계속하여 감탄하게 된다. 성인은 불완전해보이는 것을 교정, 규제하려 하지 않고 가만놔두는 데, 사실 불완전해보이지만 균형이, 현상이 계속 변함을 고려하면,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 아니고, 지금의 균형일 뿐이다. 현재만 보고 좋고 나쁨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멀리할 것을 말하고 있다.

 

59장.

사람을 지도하고 하늘을 섬기는 일에 검약하는 일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검약하는 일은 일찌감치 도를 따르는 일입니다.

 

검약한다는 것은 무조건 아끼고 절약한다는 것보다 '함부로 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위로, 작위로 무엇을 하려하기보다는 순리에 따라 무위, 즉 함부로 하지 않게 되면 보존되고, 보존되면 덕이 쌓이고, 덕이 많이 쌓이면 이겨내지 못할 것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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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장.

굳건히 선 사람은 뽑히지 않고, 확실히 품은 사람은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그 자손은 대대로 제사를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도"만이 자자손손 이어질 수 있다, 영원할 수 있다. 도를 개인이 실천하면 개인이, 가정이 실천하면 가정이, 마을이 실천하면 마을이, 나라가 실천하면 나라가, 세상이 실천하면 세상이 영원할 것이다. 그 방법은 자신을 자신으로 보고, 가정을 가정으로 보고, 마을을 마을로 보고, 나라를 나라로 보고, 세상을 세상으로 보는 것이다. 가정의 순리와 나라의 순리가 다르듯이, 가정의 순리로 나라의 순리를 보면 인위, 작위가 생길 것이므로 그래야 한다.

 

55장.

덕을 두터이 지닌 사람은 갓난아이와 같습니다.

조화를 아는 것이 영원입니다. 영원을 아는 것이 밝음입니다.

 

갓난 아이가 뱀이나 벌레에 쏘이지도 않고, 사나운 짐승들에 의해 해하지 못하고, 하루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것은, 갓난 아이의 모든 행위는 순리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면 참지 않고, 운다. 그렇다고 욕심내어 많이 먹지도 않고, 배부르면 다시 잠이 든다. 갓난아이의 행동은 즉흥적이나(?) 무언가에 거슬리는 것이 없이 거침없다.

 

56장.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말하고 있듯이 "도"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말로서는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따라서 "도"를 정말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으며, 말하는 사람은 말하는 순간 "도"에 대해 부족한 설명을 할 뿐이다.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고, 얽힌 것을 풀어준다. 날카로운 것과 무딘 것, 얽힌 것과 푸는 것, 상반되어 보이지만 역시 변화를 통해 두 개념은 다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원래 다 "도"라는 "하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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