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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대왕이여, 불도란 쉽고도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보시로도 얻을 수 있지만, 수천의 보시로도 얻지 못하기도 합니다. 불도를 얻기 위해서 가난한 자를 돕고 병든 자를 치료하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여 만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푸십시오. 많은 사람에게 보시하고 선행을 쌓으며 스스로 겸손해 남을 존경해야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자기가 쌓은 공덕을 내세우거나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을 닦으면 뒷날에 언젠가는 부처가 될 것입니다.

 

하나의 보시로도 얻을 수 있지만, 수천의 보시로도 얻지 못하기도 한다. 보시의 양보다 상에 기대지 않는 무주상보시의 공덕이 가장 큼을 말씀하고 있다.

 

12.

'집착 없이 마음을 내라고 했는데 내가 아직 완전히 깨닫지 못해서 그렇게 안되니까 나을 돕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겠다.' 이렇게 생각해서 그저 주저앉는 것 역시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수행의 목적은 남을 돕는 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흔들림 없는 참자유 참행복을 누리기 위해 수행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머무름이 없어야 한다는 참뜻을 바르게 알았다면, 완전한 자유와 행복에 이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나갈 뿐입니다.

 

보시를 함에 있어, 남을 돕는다는 생각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모든 것이 하나에서 나온 것임을 알면,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곧 나를 돕는 것이니, 누군가를 위해 돕는다는 생각이 없고, 그저 무심히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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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세상에 물보다 더 부드럽고 여린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단단하고 힘센 것을 물리치는 데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습니다. 이를 대신할 것이 없습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기는 것 세상 사람 모르는 이 없지만 실천하지는 못합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또 낮은 곳으로 위치하려 할 뿐이지만, 단단한 바위를 깎고, 모든 것을 다 품고 아래로 아래로 흐를 뿐이다. 이렇게 부드럽고 낮은 데에 위치하려 하는 물이 단단하고 힘센 것들보다 훌륭하다는 것을 알지만, 이를 실제로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백성들을 통치하고 나라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물처럼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여 온갖 궂은 일을 떠맡아야 할텐데 그것이 쉽지 않으며, 실제로 그런 지도자 역시 드물다.

 

79.

깊은 원한은 화해하더라도 여한이 남는 법입니다. 이것이 어찌 잘된 일이라 하겠습니까?

하늘의 도는 편애하는 일이 없이 그저 언제나 선한 사람의 편에 설 따름입니다.

 

원한을 사게 되면 화해를 하더라도 그 원한이 완전히 가시지 않는다. 따라서 "도"의 관점에서 원한 살 일 역시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므로 그저 낮추고, 부드럽게 포용하여, 남의 허물을 자기 것으로 감수하는 "자애"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노자는 이를 성인은 스스로를 빚진 자, 즉 채무자의 입장으로 여기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거친 말을 하거나 원한살 일이 없다고 한다. 하늘은 그저 순리, 도의 원리에 따를 뿐이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늘의 뜻에 내 뜻을 맞추고 물처럼 하늘의 길에 내 발걸음을 맞추기 위한 자기 낮춤, 자기 비움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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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수기란 어떤 법을 받아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움켜쥐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음으로써 부처를 이룰 수 있다는 깨달음의 약속입니다.

 

하늘의 태양과 달과 별이 그 누구의 것도 아니듯이 공기와 물과 흙 또한 그 누구의 것도 아니며 집도 차도 사람도 그 누구의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쓰일 뿐이니 누가 쓴다 해도 인연에 따르는 것일 뿐입니다. 보살은 그런 마음으로 분별심없이 불국토를 장엄합니다.

 

상을 깨고 한 발 물러나서 바라보면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이 생기든지 미워하거나 원망할 일이 없습니다.

 

더러움과 대립하는 깨끗함, 악에 대립하는 선을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떠한 상도 짓지 않고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걸림없는 마음, 육근 경계에 머문 바 없는 마음을 청정한 마음이라고 이름 지어 부를 뿐입니다.

 

더러움과 깨끗함, 악과 선, 상반되어 보이는 것들이 같은 하나에서 나왔음을 알고, 눈으로 보이는 그대로의 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그에 대해 어떤 감정이나 마음을 머문 바 없이 대하라는 뜻인 것 같다.

 

크다는 실체도 작다는 실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크다고도 하고 작다고도 합니다. 다만 인연에 따라서 크다고 이름할 뿐이고 작다고 이름할 뿐입니다. 이렇듯 고정불변의 절대적 기준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구분은 인연을 따라서 나타났다 인연을 따라 사라지는 상대적 현상일 뿐입니다.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인 것이니, 욕심내거나 화내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는 것 같다.

 

금강경을 읽으면서 느끼는 바는 정말 깜짝 놀랄만큼 도덕경에서 말하는 바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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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백성이 굶주리는 것, 윗사람이 세금을 너무 많이 받아 먹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굶주리는 것입니다.

 

노자님이 살던 이천년전의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사는 곳은 다 같은가 보다. 그러니 그 시절 노자, 공자 등 성현들의 말씀이 아직도 유효한 것이겠지. 지배층의 인위적인 행동들이 백성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불러옴을 경계하고 있다. 오강남 선생님은 이렇게 표현하고 계시다.

위정자가 성을 쌓는다, 왕궁을 건립한다, 도로를 낸다, 운하를 판다, 이웃 나라와 전쟁을 한다, 뭐를 한다 하면서 계속 부산을 떨거나 법령을 만든다, 제도를 재정비한다, 뭣을 개혁한다 하면서 백성을 부역이다 군역이다 복역이다 등등 인위적인 다스림으로 못 살게 하니까 자연히 저항하고 반항하고 도피하고, 그래서 다스리기가 힘들어진다.

그렇다면 순리에 따르면 나라가 다 잘 될 것이라 말하고 계신데, 순리에 따르는 지배는 어떤 것인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놔두는 것인가? 도에 의한 다스림은 어떤 것일까...

 

76.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으면 단단하고 강해집니다.

온갖 것, 풀과 나무 살아 있으면 부드럽고 연하지만 죽으면 말라 뻣뻣해집니다.

그러므로 단단하고 강한 사람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사람은 삶의 무리입니다.

 

완강함, 인위, 작위, 고집, 불통 등이 결코 유연함, 겸손, 양보 등을 이길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인위, 작위는 순리에 따르는 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77.

하늘의 도는 활을 당기는 것과 같습니다. 높은 쪽은 누르고 낮은 쪽은 올립니다. 남으면 덜어주고 모자라면 보태 줍니다.

 

즉, 도는 순환을 통해 균형을 찾아간다. 인간의 삶 역시 남는 것을 통해 부족한 곳을 채우고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 "도"를 따르는 삶인 것이다. 순환을 통해 다 돌고 도는 것이니, 지금의 모습에 연연해 할 것도, 아까워 할 것도 없이 다 흘러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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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수다원

예류에 든 사람이라면 잠시 어리석음에 휘둘려도 이내 정신을 차리고 돌이켜서 바른 길로 되돌아옵니다. 화를 냈다가도 아집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아차리고, 욕심을 냈다가도 그것이 자기 욕심임을 알아차리고, 꿈을 꾸다가도 그것이 꿈인 줄 알아차립니다.

 

잘못된 줄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행동과 말들, 즉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죽음의 길인지 어떻게 하면 괴로움이 일어나는지를 바르게 보고 바르게 알아차려야 한다.

 

사다함

사람들은 대게 감정이 나타나기 전에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지나가는 느낌을 감지하지 못하는데, 그 느낌은 바로 쾌 또는 불쾌, 또는 쾌도 아니고 불쾌도 아닌 경우입니다. 이러한 쾌와 불쾌에 따라서 하고 싶다는 욕망이나 하기 싫다는 혐오가 일어납니다. 그 마음을 愛라고 합니다. 애가 일어 났을 때, 하고 싶다든가 하기 싫다는 욕망에 끌려가면 그 욕망을 따라 행동하게 되고, 그 행동에는 반드시 과보가 따릅니다. 이렇게 해서 어리석은 삶이 되풀이됩니다. 그런데 부지런히 수행 정진해서 쾌와 불쾌가 일어나는 그 순간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으면 업식이 경계에 반응은 하되 새로운 욕망을 일으키지는 않게 됩니다.

 

쾌와 불쾌가 일어나는 순간에 좋거나 싫다는 반응을 하지 말고, 그 감정을 바라보는 것이다.

 

돈을 못 벌었다고 우는 사람이나, 권력 못 잡았다고 우는 사람이나, 명예를 못 얻었다고 우는 사람이나, 도를 못 얻어서 우는 사람이나 상에 집착해서 생기는 괴로움 속에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상을 짓고 집착한다는 점에서는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든 상을 내려놓으면 동산이라는 말을 들어도 다툼이 없고 서산이라는 말을 들어도 다툼이 없습니다. 동산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가 서쪽에 사는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서산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가 동쪽에 사는 사람임을 알아차리니 다툴 일이 없습니다.

하나의 상을 지으면 저절로 두 개의 상이 됩니다. 깨끗하다는 상을 지으면 반드시 그 옆에 더럽다는 상이 생기고, 선하다는 상을 세우면 그 옆에 저절로 악하다는 상이 생깁니다. 그래서 두 개의 상이 생긴다는 것은 만 개의 상이 생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법의 실상은 만 가지 상이 다 일상으로부터 일어난 것인데 그 일상마저도 없다는 무상인 것입니다.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개념이 하나의 상에서 나온다는 사실, 또한 거기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개념들. 이 모든 것은 원래 하나였으며, 더 나아가 그 하나조차도 없다는 무상의 경지가 바로 '해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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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장.

하늘의 도는 겨루지 않고도 훌륭히 이기는 것이고, 말하지 않고도 훌륭히 응답하고,

부르지 않아도 저절로 찾아오고, 느슨하면서도 훌륭히 꾸미는 것입니다.

하늘의 그물은 광대하여 엉성한 것 같지만 놓치는 일이 없습니다.

 

오강남 선생님의 풀이가 마음에 꼭 와닿는다.

우리의 제한된 생각으로는 당장 뭔가 설치면서 저돌적으로 나가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 같고, 비폭력주의 같은 소극적 대처 방안에 따라 처신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실패할 것처럼 보이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하늘이 그렇게 엉성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 그러니 상대방의 잘잘못을 가지고 당장 너무 조급하게 반응하지 말라. 결국은 하늘의 정의가 강처럼 흐르게 될 것이라는 하늘에 대한 신뢰감을 가지고 살라는 것이다. "물은 물대로 간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뭔가 억지로 꾸역꾸역 일을 해나가는 사람이 있다. 끈기로 열심히 한다는 느낌보다, 자기 중심적으로 한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들. 당장 눈 앞의 기회를 잡지만, 끝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러한 것을 경계하는 말씀 같다.

 

74장.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어떻게 죽음으로 그들을 위협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언제나 죽음을 두려워하도록 하고 이상스런 짓을 하는 자가 있어 내가 그를 잡아 죽인다 하면 누가 감히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충신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반역을 한 후 충신들을 붙잡거나, 전쟁을 한 후 망국의 충신들을 붙잡아 충성을 강요하는 모습.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충신들에게는 그런 강요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한다. 순리에 따르지 않고, 충신을 죽인 정권은 더 큰 반란이나 비판 여론에 직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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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기준을 가지고 열심히 산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스스로를 옭아매는 속박의 끈을 더 단단히 조여 맨 것에 불과할 때가 많습니다. 누에가 제 입에서 나온 실로 고치를 만들고 그 속에 갇히듯, 내가 일으킨 생각에 사로 잡혀 스스로를 구속합니다. 고정관념으로 만들어진 온갖 상을 깨뜨리면 나비가 고치를 뚫고 나와 창공을 훨훨 날듯 내 앞에 자유로운 세상이 활짝 펼쳐집니다. 그것이 바로 해탈입니다.

 

살며, 배우고, 익히는 것들이 오히려 나를 현재에 머물게 한다. 언제든 다 내려놓고 무에서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부처는 이 세상에 한 물건도 본래 내 것 네 것이 없다는 것을 중득한 사람입니다. 무소유, 무소아이므로 더 이상 주고 받는다는 생각이 없고 다만 필요에 따라 쓰일 뿐이지요.

 

모든 것이 하나에서 나와, 구별이 없는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 같다.

 

물이 그릇에 따라 모양을 바꾸듯 인연따라 그때그때 바뀌어야 문제가 없습니다. 인연 따라 사는 삶이 집착이 없는 삶이고, 그것이 바로 무위의 삶입니다.

 

내가 난데...라는 마음을 버리고 유연함을 가져야 한다.

 

8.

지금 내것이라고 믿는 것은 잠시 내 손에 머물러 있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누구의 것도 아니기에 누구에게 얼마만큼 내준다 해도 그것은 나의 공덕이 아닙니다. 본래 이 물건이 누구의 것이 아닌 줄을 알면 이것을 누구에게 보시한다고 해도 아무런 공덕을 지은 바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원래 다 하나에서 나왔음을 알면 무주상보시를 할 수 있게 된다.

 

옳고 그름 역시 그러습니다. 다만 인연에 따라 그때그때 상황속에서 잠시 형상을 갖추고 나타나는 것이지, 옳다 그르다 할 본래의 성품이 없습니다.

 

지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절대적인 진리는 없는 것이니, 알고 있는 지식에 집착하거나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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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강을 건너고 나면 뗏목을 버리고 길을 가야 하듯, 부처님은 불법 역시 집착할 바가 못된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법조차 집착하지 않고 놓아버려야 하거늘 법 아닌 것, 내 생각이나 고집, 재물이나 명예, 권력 따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나를 통과하여 흘러가거나, 내가 모든 것을 통과하거나 흘러가는 것... 집착하거나 소유하려하지 말 것.

 

내가 주인이 되면 내가 세상을 움직일 수 있으나, 상에 집착하면 그 상이 나의 주인이 됩니다. 상에 집착하는 것은 나를 꽁꽁 묶어 스스로를 구속하는 일입니다. 상을 여의는 것, 그것이 내 인생의 자유를 활짝 열어주는 불법의 길입니다.

 

상에 집착해 있는 '나'로부터 벗어나는 것. 살면서 경험을 하고 공부를 하고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기 위해 문자로서, 글로서 정리를 하고 외우는데...정작 그러한 행위가 더 나를 속박하고 현재에 집착하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

 

아직 많이 읽지 않았지만, 중고등학교 때 국사시간에 배웠던 기복신앙으로서의 불교가 아닌, 정말 심오한 철학임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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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내 것이라는 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보시는 '내가 그에게 내 것을 주었다'는 마음으로 남습니다. 거기에서 보상 심리가 싹트고, 그 싹이 자라 원망과 배신감의 열매를 맺습니다. 하지만 실상으로 본다면 본래 내 것이 없으므로 우리는 아무런 기대 없이 무주상보시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상에 집착하지 않고 행한 보시, 보시했다는 생각 없이 행한 보시의 복덕은 한량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상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상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비로소 세상의 참모습을 보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내가 지금 지향하는 목표, 지금 내 삶의 기준, 지금 내 눈에 그럴 듯해 보이는 형상이 마치 불변의 최고 가치인 양 매달려 살아가는 게 사람들의 삶입니다. 이렇게 상에 집착하면 괴로움의 씨앗이 뿌려져 그 누구도 과보를 피하지 못합니다. 상이 허망함을 깨치고 모든 형상의 집착을 뛰어넘어야만 부처의 도리를 알고 자유와 행복의 참맛을 볼 수 있습니다.

 

그대가 사라져 버릴 내 몸을 보았다 한들 대체 그것이 뭐란 말입니까. 박칼리여, 사물의 참다움을 보는 자는 나를 볼 것이요, 나를 보는 자는 사물의 참다움을 보는 것입니다.

 

좋고 나쁨을 구분하는 기준, 문제라고 판단하는 기준은 다 내 생각일 뿐입니다. 그 사실을 깨달으면 괴로움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본래 나쁜 것도 없고 본래 좋은 것도 없는 줄을 알면, 좋고 나쁘다는 상으로 생긴 온갖 시비와 갈등이 사라집니다.

 

일체 모든 것에 대한 구분이 없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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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장.

성인은 굵은 칡베 옷을 입지만, 가슴에는 구슬을 품고 있습니다.

 

"도"는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보아야하므로, 범인은 이해가 어렵다.  노자께서 계속 상반된 개념이 하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범인들에게는 그저 역설일 뿐이다. 이분법적 세계를 초월하여 합일의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성인은 오히려 범인들에게는 이상해보이고, 배척당할지 모르나, 안에는 '구슬'을 품고 있다.

 

71장.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이 가장 훌륭합니다.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하는 것은 병입니다.

 

범인은 초이분법적인 도를 알기 어렵다. 따라서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이 범인 중에서는 가장 훌륭하다. 모르면서 안다고 착각할 때, 인위, 분별이 생기면서 순리에 어긋나게 되고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집착하게 되는 것, 즉 병인 것이다. 성인은 순리에 어긋나는 법이 없다.

 

72장.

사람들이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더욱 큰 두려움이 이를 것입니다.

 

"도"로서 통치하는 법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 같다. 백성들이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자신이 '도'를 모른다는 사실인데, 그것이 아니라 '통치자'를 두려워하게 될 경우, 이는 잘못된 통치이며, 어떤 더 큰 존재에 의한 더 큰 두려움이 닥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순리대로 살 수 있게 해야하며, 성인 '통치자'는 스스로를 드러내거나 치켜올리는 등 인위나 작위를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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