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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정심행선(淨心行善)은 물이 자기의 모습을 고집하지 않고 담기는 그릇에 따라 모양을 바꾸듯 그렇게 자연스러운 행을 말합니다.

 

정심은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무주의 마음이고 어떠한 형상도 짓지 않는 무상의 마음입니다. 또한 일체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무념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생각을 일으킬지라도 집착의 그림자를 달지 말아야 하고, 모양을 짓더라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며, 또한 그 모양이 영원하지 않음을 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형상은 한순간의 모습에 불과해 번갯불 같고 그림자와 같습니다. 모든 모양은 공하여 단지 허깨비일 뿐인 도리를 알 때 비로소 본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바람불고 비오고 햇빛 비쳤다가 눈이 오고, 그렇게 여러 모습으로 흘러가는 게 세상입니다. 본래 그런 세상의 움직임을 가지고 시비하고 온갖 상을 짓고 거기에 빠져 죽네 사네 아우성을 치는 게 중생입니다. 그런 이치를 안다면, 모든 괴로움이 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안다면, 정말로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손에 꽉 움켜쥐고 있는 자기 생각을 내려놓으면 됩니다. 이것이 방하착放下着입니다.

 

다람쥐가 숲속을 뛰어다닐 때, 이 바위와 저 바위는 왜 이리 멀고 이 돌은 왜 이렇게 크고 이 나무는 왜 이렇게 높냐고 따지면서 다닙니까? 나무가 높으면 높은 대로 열심히 올라가고, 작으면 작은 대로 재빠르게 올라가고, 사이가 많이 벌어진 바위는 있는 힘껏 펄쩍 뛰고, 가까이 붙어 있는 바위는 부지런히 걷고, 아무 불평불만 없이 주어진 조건 그대로 살아갑니다. 사람들처럼 하나하나 다 따져가면서 불평불만을 늘어놓자면 다람쥐도 아마 숨이 넘어갈 겁니다.

 

머리가 아프도록 생각을 많이 하고 괴로워하는 건 단지 오래도록 습관이 되어버린 망상이 나도 모르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꽉 움켜쥐고 있는 자기 생각만 내려놓으면 그만입니다.

 

정말 너무 평범하고 당연한 자연의 모습에서 큰 가르침을 찾아내어 말씀하고 계시다. 물, 자연...그렇다 억지가 아닌 그저 순리대로 흐르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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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여기 칼이 있습니다. 이 칼은 흉기일까요? 아닙니다. 이 칼은 흉기가 아니라 수술실에서 사람을 살리는 데 쓰는 도구입니다. 그러면 이 칼은 유용한 도구입니까? 아닙니다. 이 칼은 사람을 다치거나 죽게 만드는 흉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칼은 유용한 도구도 아니고 흉기도 아닙니다. 칼은 본래 공입니다. 칼이 본래 공하므로 어리석은 사람이 잡으면 흉기가 되고 의로운 사람이 잡으면 사람을 살리는 보배의 검이 됩니다.

한 생각에 사로 잡혀 있으므로 중생이고, 한 생각 돌이키면 그는 이미 부처입니다. 마음이 깨달으면 부처요, 마음이 어리석으면 중생입니다.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지 않으니 다 일심에서 일어나는 모습입니다.

 

칼이라는 한 가지 사물이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를 모두 의미할 수 있다. 둘 다 같은 칼인데, 괜히 사람의 분별을 해 놓은 것이다. 칼은 처음부터 그냥 칼일 뿐이다. 어떤 일어난 일도 좋고 나쁨이 없다. 그냥 일어난 것인데, 사람이 행운이니 불운이니 분별을 할 뿐이다.

 

22.

만일 내가 한 법도 정해져 있지 않음을 알고 나라는 고집을 완전히 버린다면, 나는 그 무엇도 정해진 바가 없는 까닭에 오히려 무엇이든지 될 수 있습니다. 텅 빈 그릇에는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전체에서 바라보면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고 있다고, 그것이 마치 자기만 아는 값진 지식인 것처럼, 절대 법칙, 자신만의 규칙인 것처럼 그것에만 의지하는 것은, 그저 작은 지식에 집착함으로써, 더 큰 앎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다.

 

고정관념과 고집을 놓아버릴 때, 그의 존재는 현재의 환경 속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상황은 이미 일어났다.'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명제입니다.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한 상황이 지금의 내 현실입니다. '다른 사람과 결혼했으면 좋았을걸'하고 생각한들 모두 번뇌에 불과합니다. '나는 저 사람과 맞지 않아'하고 고집하는 마음은 불행을 자초합니다. 세상에 나와 맞지 않는 사람, 나와 맞지 않는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와도 맞추어 살 수 있습니다.

 

어렵게 배운, 깨친, 경험한 지식도, 그것에만 집착하고 아집에 빠진다면 그저 고정관념이고 고집일 뿐이다. 다 흘러가게 놓아야 한다. 그래야 새로이 필요한 새로운 앎이 자리하게 된다.

 

내가 처한 조건에서 나를 고집하지 않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는 그 마음이 아상을 소멸해 가는 수행입니다. 이 것이 부처의 법이며 금강경에서 설하는 가르침의 요체입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한 삶을 살아가되, 나를 고집해 잘났다거나 못났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어리석은 분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끊임없이 부딪치고 나를 고집하고 경계에 휘둘리는 일상의 순간순간을 포착해 거기에 반응하는 내 일거수 일투족을 알아차리고 마음의 뿌리를 찾아간다면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부처님의 참된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정관념과 고집을 버리고(절대적인 법칙이 없음을 알고...라고 표현해도 될지는 아직까지 모르겠음), 물처럼 머문 바 없이, 집착하는 바 없이, 모두가 하나임을 알고 분별을 버리라는 것이다. 또한 아직도 이렇게 주변에 맞추어(어쩌면 노자가 말씀하시는 순리대로 사는 것) 사는 것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한 삶"과 연결되는 건지는 매끄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다만, 그러한 말씀이 내가 사회생활을 하며, "아 저 사람은 자존심도 없나? 저 사람은 숨막혀서 어떻게 사나? 저렇게 시키는 거 다하고, 저렇게 힘든 사람을 다 맞춰주고...저렇게 까지 살아야 하나?'라고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이런 마음이었구나...라고 조금 이해되게 하는 부분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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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나와 네가 연기된  하나의 몸임을 알고 내가 너를 제도하는 것이 아님을 알면, 거기에는 교화한다는 생각도 없고 제도한다는 생각도 없고 바라는 마음도 없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머무를 데가 없습니다. 발에 가시가 박혔을 때 머리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입이 '아야!' 소리를 내고, 눈이 가서 살펴보고, 손이 가시를 골라 빼내는 것과 같습니다. 중생과 나를 구분하지 않으므로 중생의 문제가 곧 내 문제니 다만 스스로 행할 따르입니다.

 

마치 한 몸처럼 다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머문 바 없이 마음을 내면 되는 것이다.

 

만약 더러움의 씨앗, 깨끗함의 씨앗이 존재한다면 더러움은 언제나 더러움에만 머물러야 하고 깨끗함은 늘 깨끗함으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더럽다고 할 본질도 깨끗하다고 할 본질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하가 손가락질하던 유녀들도 청정한 수행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갖가지 관념의 벽, 분별의 다리가 끊어질 때만이 맑고 투명한 지혜의 눈이 열리고, 비로소 그때 진정한 여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래는 지혜의 눈으로 보는 존재의 참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물은 본래 자기 모양이 없습니다. 담기는 그릇에 따라 모양을 만들어냅니다. 그때그때 모습이 바뀌므로 어떤 대상과도 마찰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막으면 고이고, 차면 넘치고, 이쪽을 막으면 저쪽으로 흐르고, 사방이 막히면 조용히 기다립니다. 이러한 물의 모습이야말로 자기 모양을 갖지 않는 전형이라 할 만합니다.

규정하고 집착하는 마음을 풀어버리는 것이 상을 떠나는 길, 모양을 떠나는 길입니다. 마음이 물처럼 흘러갈 때 우리는 점점 더 자유로운 상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상이 상이 아님을 알 때 깨달음을 얻는 이치입니다. 제상이 구족하다는 가르침은 구족하다고 규정할 기준이 본래 없다는 뜻이며, 고정된 상이 본래 없으므로 '이것을 하라'거나 '이것을 하지 마라'는 가르침도 다만 인연에 따라 생길 뿐입니다.

 

도덕경에서 노자가 말씀하신 물처럼 순리에 따르는 삶이, 금강경에서는 부처님께서 특정 상에 집착하지 않는 삶으로 말씀하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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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부처와 중생, 번뇌와 보리, 주관과 객관, 본질과 현상을 둘로 나누어 모양을 지으면 그것은 상이 되어 버립니다. 일체가 한 몸이고 하나임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일체동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늘 사랑받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하고 도움받고 싶어합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얻고자 합니다. 삶의 괴로움은 이렇게 남에게 의지하고 기대하는 마음, 얻으려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해지고 싶은 이는 얻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고 이해하고 베풀며 남을 위하는 마음을 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입니다.

그러나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을 세워 실천하더라도 내가 지금 중생을 제도한다는 마음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나와 중생을 구별하고 내가 중생을 제도한다는 생각은 내 마음이 일으키는 분별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내 분별이 사라지면 세상은 있는 그대로 청정하고 모든 사람이 지금 그대로 완전한 부처임을 볼 수 있습니다. 장엄할 국토도 없고 제도할 중생도 없는 이치가 이와 같습니다.

 

계속하여 상을 짓는 것, 구분하는 것, 분별심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

 

본래부터 복이라는 게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이라고 부를 뿐 정해진 복의 성질이란 없습니다. 재앙의 성질 역시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복이라고 하는 그것이 사실은 재앙일 수도 있고, 세상 사람들이 재앙이라고 말하는 그 일이 사실은 복일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복과 재앙을 거꾸로 잘못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재앙의 성질도 복의 성질도 아무 정해진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제법이 공한 이치가 그것입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임하느냐에 따라 온갖 것이 다 복이 되기도 하고 온갖 것이 다 재앙이 되기도 합니다. 중생심으로 보는 이에게는 재앙이 되고, 불보살의 마음으로 대하는 이에게는 복이 됩니다. 복이라고 할 성질이 없으므로 인연따라 세상 모든 일이 다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본래 복덕이라고 할 것이 없으므로 오히려 복덕이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복은 기다리는 것이 아닌, 받을 자가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모든 일이 다 복이 될 수 있으므로.

 

얻으려고 하면 아무리 많은 것을 받아도 부족하고, 주려는 마음을 내면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실제로 베풀 수 있는 조건이 이루어집니다. 얻는 것이 소원인 사람의 원이 성취되려면 남에게 도움을 얻을 만한 상황에 처해야만 합니다. 자꾸 얻으려고만 하면 자꾸 그만큼 불쌍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고, 자꾸 베풀려는 마음을 내면 베풀 수 있는 조건이 자꾸 다가옵니다. 얻으려는 소원이 성취된다는 것은 불쌍하고 도움 얻을 만한 처지가 된다는 것이니, 이런 중생심의 기도는 성취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복덕의 성품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은 이치를 알아야 합니다. 아무런 성품이 없으므로 인연에 따라 복의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재앙의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마음의 미혹이 사라지면 내 밖의 세계는 다 공한 법입니다. 그것이 내 것이라는 망념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움직여 흐르고 있을 뿐인 실상의 참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 실상을 아는 사람에게는 결코 내 것을 남에게 주었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받을 복이 있다는 생각도 일어날 여지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하나의 우리를 흐르고 있는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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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괴로움과 번뇌는 내 욕구대로 세상이 움직이길 바라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되고, 내 생각에 갇혀 분별을 일삼는 데서 일어납니다. 옳으니 그르니, 잘했으니 잘못했느니 하는 시비 분별을 떠나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는 안목이 지혜의 눈입니다. 혜안이 열려 세상의 참모습을 보는 보아야 마음의 갈등이 사라지고, 가족과의 갈등이 사라지고, 이웃과의 갈등이 사라지고, 모든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불안佛眼이란 일체가 여여함을 깨친 안목입니다. 불안이 열린 붓다는 주객을 완전히 떠난 경지이므로 보이고 보이지 않는 것, 깨닫고 깨닫지 못한 것, 법과 법 아닌 것 등등 모든 구별과 대립이 없습니다. 주객이 완전히 끊어져 오고 감이 없고 주고받음이 없으니 그야말로 일체가 다 같음을 보는 경지입니다.

과거는 내 생각 속에 있을 뿐이며 지금 이 순간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과거의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한 과거는 나를 손톱만큼도 괴롭힐 수 없습니다. 내가 그때의 괴로움을 돌이켜 기억해 내서 다시금 괴로운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실현되지 않은 시간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직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도 없는 미래를 가지고 근심 걱정을 하기도 하고 기대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현재입니다. 지나간 과거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도 지금 이 순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눈팔 틈 없이 집중해야 하는 시간은 미래도 과거도 아닌 바로 현재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현재를 놓치며 삽니다. 과거를 생각하다 현재를 놓치고 미래를 걱정하느라 또 현재를 놓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는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현재란 없습니다. 그런 삶은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지금 이 시간에 집중해서 최선을 다하면 현재가 쌓여 미래가 되어가는 이치를 꿰뚫어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의 마음에는 본질적 실체가 있을까요? 지금 일어나는 괴로움과 직면해서 그 본질을 찾아나가다 보면 거기에도 또한 아무런 실체가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현재의 마음도 하나의 허망한 움직임일 뿐입니다.

마음은 매순간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이것이 마음이다'하고 내놓을 만한 실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사실 내 속에서 순간순간 일어나는 분별을 일컫는 다른 이름입니다.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두렵다, 슬프다, 외롭다하는 갖가지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든 번뇌일 뿐입니다. 일체유심조. 이 모든 게 다 내 마음이 지어내는 일입니다.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정작 중요한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 현재조차도 사실은 순간순간 일어나는 마음의 분별일 뿐. 모든 것이 구별과 대립없이 하나임을 알면 분별없이, 거침없이 무한히 자유로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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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제법이 공한 이치를 알아서 복이 복 아니고 재앙이 재앙 아닌 이치를 깨친다면, 남이 나를 미워하고 욕해도 오히려 고마운 마음을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장애를 오히려 부처님의 가피로 볼 수 있는 눈을 뜨면, 거기에 해탈의 길이 열립니다.

인연법을 아는 사람은 '지은 인연의 과보는 피할 수 없다. 내가 지은 것은 내가 받는다'는 마음으로 기꺼이 자기 과보를 받습니다. 금강경의 이 구절은 내가 지은 인연과보를 몰라 하루하루를 억울하고 분한 마음으로 탄식하며 살아가느 이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내가 지은 인연의 과보가, 세세생생 쌓인 업장이 소멸되어 가는 중입니다.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꾸준히 지켜보고 참아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자칫 잘못해서 부정적인 마음에 휘둘리면 '나는 도저히 안돼'하는 생각에 좌절하기 십상입니다. 다 되어가는 공부를 놓치지 않으려면 꾸준하게 지켜보는 여유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윤회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이어져 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17.

누가 어떤 사건이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닙니다. 내 고집과 내 생각에 빠진 어리석음이 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괴로움이란 본래 없습니다. 이렇게 괴로움이란 것이 본래 없다는 것을 아는 이가 부처고, 본래 없는 괴로움에 사로잡혀 허우적거리는 이가 중생입니다.

 

그 돈이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닌 줄 알면 돈을 주고도 주었다는 마음이 일어날 여지가 없습니다. 그 돈이 내것이라는 생각때문에 내가 그에게 돈을 주었다는 마음이 남는 것입니다. 남을 도와준 뒤에 도와줬다는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그것이 '내 것'이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 만물은 본래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다만 지금 거기에 존재할 뿐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실상을 깨치면 남을 도와주고도 도와줬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베푼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모든 게 내 빚이다, 전생에 신세 진 일을 깜빡 잊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무거운 기대감에 발목 잡히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근본은 내 것이란 없다, 내것이니 네것이니 하는 구분은 다 내 생각이 지어놓은 상이라는 데 있습니다. 내 것이다-네 것이다, 깨끗하다-더럽다, 높다-낮다, 생긴다-사라진다, 만법이 다 생각따라 마음따라 일어납니다. 이 이치를 깨닫고 집착을 버릴 수 있다면 마음은 금세 편안해집니다. 그 실상을 깨친 자리에는 일체 번뇌가 자리할 수 없습니다.

 

도덕경에 따르면 만물이 물처럼 흐르다 나를 흘러 지나가는 과정이었던 것 처럼.

 

봄비가 내리면 땅속에 묻혀 있던 씨앗들이 너도나도 싹을 틔웁니다. 수십 수백가지의 새싹이 젖은 흙을 밀치고 올라옵니다. 같은 땅, 같은 햇빛, 같은 수분, 같은 조건에 처해 있는데도 수없이 다른 종류의 싹이 올라오는 이유는 씨앗이 달라서입니다. 그처럼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도 사람마다 제각각 생각이 다른 것은 저마다 마음의 씨앗인 업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좋다는 마음도 자기 씨앗으로부터 일어나고, 싫다는마음도 자기 씨앗으로부터 일어납니다. 부처님이 방긋 웃으신 이유도 바라문의 그러한 마음자리가 훤히 보였기 때문입니다.

 

어제 아파트 지상 주차장에 들어설 때, 경비아저씨가 다짜고짜 거기에 차를 세우지말라고 소리쳤다. 뜬금없는 고함에 당황하여 나도 고성을 내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지상에 자리가 없어 들어가봤자 한바퀴 돌고 나올텐데, 그것을 알려주고 싶어 그랬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다 다르고, 공부하고 있어도 이렇게 상대방을 이해하기가 어렵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부처님은 그런 순간에도 상대방이 그러한 반응을 하게 된 모든 과정을 한 눈에 꿰뚫으시고 오히려 웃음으로 대하신다.

 

내가 옳다는 데 사로잡히면 화가 나지만, 내가 옳다는 생각이 없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 순간적으로 내가 옳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화를 내더라도 그것이 내가 옳다는 내 생각에 사로잡혀서 일어난 줄을 알아차리면 화는 금세 사라져버립니다.

지금의 행동은 오래전부터 형성되어 온 일정한 조건과 주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 이전부터 쌓아온 업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지금 일어난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내 주관과 시비를 내려놓고, 이미 일어난 일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피고 인정할 때 진실의 문이 열립니다. 그 사실이 내 도덕적 기준에 합당한지 아닌지는 그 다음 일입니다. 인정하는 것이 먼저고 합당함을 살피는 것은 그 뒤의 일입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머리로 가늠할 수 있어야만 그 존재를 인정합니다. 차별 현상계인 사법계에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감각으로 인지하는 세계를 색이라고 합니다. 색은 인연따라 모습을 달리 합니다. 색을 규정하는 고정불변의 성품이란 존재하지 않으니, 본질의 세계에서 보면 색은 텅 비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색즉시공입니다. 또한 고정불변의 본질은 존재하지 않지만 색은 인연따라 나타나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공즉시색입니다.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인데 있다는 생각에 매달리면 유에 빠지게 되고, 없다는 생각에 매달리면 무에 빠지게 됩니다.

 

도덕경에서 노자가 말씀하신, 인간 감각에는 한계가 있어 '도'를 정확히 알 수 없으며, 감각으로 알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말씀과 조금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인연을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인연에 어긋나면 문제가 생깁니다. 물은 언제 어느때라도 담기는 그릇에 따라서 그 모양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세상살이도 그처럼 조건과 시간과 공간에 맞게 인연을 따를 때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도덕경에서 노자가 말씀하신 '순리에 따를 때, 거침없게 된다.'는 말씀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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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내가 노력보다 수입이 많으려면 누군가는 노력보다 수입이 적어야 합니다. 내가 능력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려면 누군가는 능력보다 낮은 지위에 있어야 합니다. ... 그렇게 보면 우리가 바라는 복이란 결국 누군가의 손실을 바탕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복을 얻음으로써 남이 손실을 받았다면 그 손실은 언젠가는 나에게 되돌아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재앙이지요.

 

띠용.... 머리를 세게 얻어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 모든 것이 하나에서 출발하였다는 것, 도덕경에서 노자가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이며, 부처님 또한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다. 살면서 이상하게 뭐든 잘풀리는 운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봤었고 항상 부러워했었다. 나는 보통 내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남이 보기에도 정말 힘들고 많은 노력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는 순간... 그러한 내 삶에 감사하게 되었다. 나로 인해 누군가에게 손실이 없이 노력만큼 받을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오히려 노력보다 과분한 것을 받은 것은 아닌지 겸손하게 다시 한번 되돌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보살은 나와 내 가족을 떠나 온 인류를 생각하고 온 생명을 위하는 무주상의 보살행을 실천합니다. 남을 이롭게 하고, 남을 살리고, 남을 즐겁게 하고, 남을 편안하게 하는 사람이 바로 보살입니다. 세상의 복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복을 짓는 사람이 보살입니다.

 

출장 중 선배 한 분은 우리가 진행중이었던 프로젝트를 겪게 될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항상 생각하였다. 나는 나도 예전에 그 입장을 겪었었고, 그리고 연차가 쌓여 이렇게 프로젝트 계획에까지 오게 된 것을 당연한 과정으로 생각하여, 진행과정에서 조금씩 부딪히는 부분이 있었다. 참여하게 될 그들에게 정말 도움이 될지를 먼저 고민했었으면 더 좋았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람들은 불행을 행복으로 삼고 보살심의 씨앗으로 삼는다는 게 현실과는 동떨어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우리 삶 속에서 얼마든지 실현 가능하고 또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보살은 넘어진 김에 그 돌부리를 캐내어 다른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치워버립니다.

이렇게 깨달음과 뉘우침과 보살행은 가장 나쁜 일을 가장 좋은 일로 만들어버립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복덕도 재앙도 없는 이치가 그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게 부처님의 가피인 줄 압니다. 하지만 나쁜 일이라는 것이 오히려 부처님의 가피인 줄 아는 이 경지에 이르면 일체가 다 걸림없는 자유로운 삶이 열립니다.

 

내가 힘들게 얻은 만큼 남들도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실 모든 것이 하나인 것을 알면 일체가 다 거침없이 자유로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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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9/15 출장

 

14.

우리는 순간순간 상에 사로잡혀 삽니다. 지금 내가 상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야 희망이 있지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꿈속을 헤메게 됩니다. 상에 사로잡힌 사람은 머리에 큰 바가지를 뒤집어쓴 채로 사는 사람입니다. 바가지가 눈을 가린 탓에 앞이 보이지 않으니 늘 이 사람 저 사람과 부디질 수밖에 없습니다. ... 그러나 내 바가지를 벗으면 나는 더 이상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살다보면, 특히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이것저것 아주 작은 것까지 다 신경쓰고 조심해야된다는 사실에, '이렇게까지 소심하게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나는 주로 눈치봐야하는 상황에서 부자유를 느끼는 것 같다. 그럴 때면 얼마나 "큰사람"이 되어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장자가 말하는 "대붕"의 날개짓을 느껴보고 싶다. 도덕경에서 노자는 순리에 따를 때 모든 것에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하였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상에서 벗어나면 상으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들을 피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상을 잃게 되면 상대의 어떠한 언행에도 나는 분별을 내지 않고, 흘려보내고,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화가나면 참지 못하고 그대로 화를 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상대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고통이 되어 되돌아옵니다. 그러니 화를 참는 것이 너와 나 모두를 위해 현명한 일이고 그것이 수행의 첫 단계입니다. 하지만 화가 나는데도 무조건 참기만 하면 화가 쌓여 도리어 병이 됩니다. 치솟는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면 언젠가는 폭발하거나 아니면 울화병이 납니다. 수행자는 문제를 피하거나 묻어두지 않고 끝까지 풀어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참는 것만으로는 완전히 행복해질 수 없고 그것은 수행의 목적이 아닙니다. 여기서 수행의 두번째 단계가 시작됩니다. 화가 날 때 화를 내거나 마음속에 그대로 쌓아두는 게 아니라 대자대비 부처님께 하소연해서 푸는 방법입니다. 기도를 하는 절실함은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지고한 평화와 행복에 이르려면 화 자체가 생겨나지 않아야 합니다. 화가 나는 마음의 근본은 살펴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나다!'하는 아상이 버티고 있습니다. 무슨 일로든 화가 잔뜩 났을 때의 자신을 돌이켜보면 그때의 내 마음은 '내가 옳다' 상대가 잘못했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여의면 더이상 아무것도 참을 것이 없습니다.

 

중생은 매사를 자기 식으로 자기 입장에서 바라봅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 각자가 자기 관점을 고집하다 보니 갈등이 생기고 싸움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내 고집과 내 생각에 갇힌 채로 세상을 보고 있었음을 깨우쳐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은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하는 이해와 참회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내가 옳다는 상을 내려 놓으면 상대의 생각과 입장이 눈에 들어오고, 상대의 생각과 입장을 이해하면 그것이 바로 상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나에게는 내 입장이 있듯이 상대에게는 상대의 입장이 있다는 그 사실만이 유일한 객관입니다.

 

나에게는 내 입장이 있듯이 상대에게는 상대의 입장이 있다는 그 사실만이 유일한 객관입니다.

정말...고개가 절로 숙여지지 않을 수 없다. 거침없이 살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여기 있는데...이 간단한 진리를 삶에 적용시키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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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어떤 사람이 열심히 수행한 끝에 욕심도 짜증도 성냄도 일으키지 않는 경지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모습을 보고 키와 몸무게는 얼마고 눈과 귀와 코의 모양은 이러이러하다고 자세히 묘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특징을 가진 사람이 모두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부처에게 삼십이상의 특징이 존재하지만, 그런 특징들로써 부처를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부처의 몸이 가지는 특징은 상에 불과합니다. 모든 상으로부터 벗어나 제법이 공한 이치를 깨치지 않고는 부처를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머리로 상상하는 것들에 매달려서는 부처를 보고도 부처인 줄을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유명 사찰을 찾고, 기도가 영험하다는 곳을 찾고, 유명한 관세음보살상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기도한다. 물론 이것도 좋지만, 이것은 상에 집착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상에 집착해서는 다가갈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시다.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지금 깨달으려 하고, 깨달은 바를 통해 목적없이 다른 사람과 나누려하는 자세야 말로 부처님께서 말하고자 하는 바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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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인구가 적은 작은 나라

열가지 백가지 기계가 있으나 쓰이지 않도록 하십시오. 백성이 죽음을 중히 여겨 멀리 이사가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타는 일이 없고, 비록 갑옷과 무기가 있어도 내보일 일이 없습니다.

 

노자님의 말씀에 따라 모든 백성이 "도"에 따른다면, 누구보다 많이 가지려 할 일이 없고, 이웃집에 누가 사는 지도 모른 채 자급자족 하며, 안분지족의 삶을 살 것이다. 왕이 누군지도 모를테고, 자기가 사는 나라가 대국인지 소국인지도 모를 것이다. 도가적 이상국가인데, 현실 사회에서 과연 가능할 것인가. 가능성은 적겠지만, 자원 전쟁, 무역 전쟁, 영토 전쟁 등 서로 더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 분쟁이 일어나는 현 시대에 이상향이라 할 수는 있겠다.

 

81.

믿음직스러운 말은 아름답지 못하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스럽지 못합니다.

선한 사람은 변론하지 않고, 변론하는 사람은 선하지 않습니다.

아는 사람은 박식하지 못하고, 박식한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도덕경의 마지막 장이다. 다시 한번 역설적인 표현을 통해, 보이는 것 외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 더 큰 것이 있음을 알고 겸손할 것이며, 상반되어 보이나 원래 하나이니, 인위, 작위, 분별을 멀리하고 순리에 따라 조화로운 삶을 살 것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계획했던 한달보다 일주일 더 걸렸지만, 매일 도덕경 읽기완수하였다.

삶의 원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정말 좋은 기회였고, 막연히 고전이라서 읽어봐야 한다는 추천보다도 훨씬 유익하고 좋은 독서 였다. 이번에 매일 도덕경을 읽고 단상을 쓰면서, 검색을 통해 여러 해석들을 참고하기도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웨인 다이어"가 해석한 "도덕경"인 "서양이 동양에게 삶을 묻다"의 해석이 참 와닿았었다.

이 책 또한 구매를 하였고, 이어서 읽어 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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