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제법이 공한 이치를 알아서 복이 복 아니고 재앙이 재앙 아닌 이치를 깨친다면, 남이 나를 미워하고 욕해도 오히려 고마운 마음을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장애를 오히려 부처님의 가피로 볼 수 있는 눈을 뜨면, 거기에 해탈의 길이 열립니다.
인연법을 아는 사람은 '지은 인연의 과보는 피할 수 없다. 내가 지은 것은 내가 받는다'는 마음으로 기꺼이 자기 과보를 받습니다. 금강경의 이 구절은 내가 지은 인연과보를 몰라 하루하루를 억울하고 분한 마음으로 탄식하며 살아가느 이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내가 지은 인연의 과보가, 세세생생 쌓인 업장이 소멸되어 가는 중입니다.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꾸준히 지켜보고 참아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자칫 잘못해서 부정적인 마음에 휘둘리면 '나는 도저히 안돼'하는 생각에 좌절하기 십상입니다. 다 되어가는 공부를 놓치지 않으려면 꾸준하게 지켜보는 여유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윤회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이어져 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17.
누가 어떤 사건이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닙니다. 내 고집과 내 생각에 빠진 어리석음이 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괴로움이란 본래 없습니다. 이렇게 괴로움이란 것이 본래 없다는 것을 아는 이가 부처고, 본래 없는 괴로움에 사로잡혀 허우적거리는 이가 중생입니다.
그 돈이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닌 줄 알면 돈을 주고도 주었다는 마음이 일어날 여지가 없습니다. 그 돈이 내것이라는 생각때문에 내가 그에게 돈을 주었다는 마음이 남는 것입니다. 남을 도와준 뒤에 도와줬다는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그것이 '내 것'이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 만물은 본래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다만 지금 거기에 존재할 뿐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실상을 깨치면 남을 도와주고도 도와줬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베푼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모든 게 내 빚이다, 전생에 신세 진 일을 깜빡 잊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무거운 기대감에 발목 잡히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근본은 내 것이란 없다, 내것이니 네것이니 하는 구분은 다 내 생각이 지어놓은 상이라는 데 있습니다. 내 것이다-네 것이다, 깨끗하다-더럽다, 높다-낮다, 생긴다-사라진다, 만법이 다 생각따라 마음따라 일어납니다. 이 이치를 깨닫고 집착을 버릴 수 있다면 마음은 금세 편안해집니다. 그 실상을 깨친 자리에는 일체 번뇌가 자리할 수 없습니다.
도덕경에 따르면 만물이 물처럼 흐르다 나를 흘러 지나가는 과정이었던 것 처럼.
봄비가 내리면 땅속에 묻혀 있던 씨앗들이 너도나도 싹을 틔웁니다. 수십 수백가지의 새싹이 젖은 흙을 밀치고 올라옵니다. 같은 땅, 같은 햇빛, 같은 수분, 같은 조건에 처해 있는데도 수없이 다른 종류의 싹이 올라오는 이유는 씨앗이 달라서입니다. 그처럼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도 사람마다 제각각 생각이 다른 것은 저마다 마음의 씨앗인 업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좋다는 마음도 자기 씨앗으로부터 일어나고, 싫다는마음도 자기 씨앗으로부터 일어납니다. 부처님이 방긋 웃으신 이유도 바라문의 그러한 마음자리가 훤히 보였기 때문입니다.
어제 아파트 지상 주차장에 들어설 때, 경비아저씨가 다짜고짜 거기에 차를 세우지말라고 소리쳤다. 뜬금없는 고함에 당황하여 나도 고성을 내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지상에 자리가 없어 들어가봤자 한바퀴 돌고 나올텐데, 그것을 알려주고 싶어 그랬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다 다르고, 공부하고 있어도 이렇게 상대방을 이해하기가 어렵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부처님은 그런 순간에도 상대방이 그러한 반응을 하게 된 모든 과정을 한 눈에 꿰뚫으시고 오히려 웃음으로 대하신다.
내가 옳다는 데 사로잡히면 화가 나지만, 내가 옳다는 생각이 없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 순간적으로 내가 옳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화를 내더라도 그것이 내가 옳다는 내 생각에 사로잡혀서 일어난 줄을 알아차리면 화는 금세 사라져버립니다.
지금의 행동은 오래전부터 형성되어 온 일정한 조건과 주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 이전부터 쌓아온 업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지금 일어난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내 주관과 시비를 내려놓고, 이미 일어난 일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피고 인정할 때 진실의 문이 열립니다. 그 사실이 내 도덕적 기준에 합당한지 아닌지는 그 다음 일입니다. 인정하는 것이 먼저고 합당함을 살피는 것은 그 뒤의 일입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머리로 가늠할 수 있어야만 그 존재를 인정합니다. 차별 현상계인 사법계에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감각으로 인지하는 세계를 색이라고 합니다. 색은 인연따라 모습을 달리 합니다. 색을 규정하는 고정불변의 성품이란 존재하지 않으니, 본질의 세계에서 보면 색은 텅 비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색즉시공입니다. 또한 고정불변의 본질은 존재하지 않지만 색은 인연따라 나타나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공즉시색입니다.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인데 있다는 생각에 매달리면 유에 빠지게 되고, 없다는 생각에 매달리면 무에 빠지게 됩니다.
도덕경에서 노자가 말씀하신, 인간 감각에는 한계가 있어 '도'를 정확히 알 수 없으며, 감각으로 알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말씀과 조금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인연을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인연에 어긋나면 문제가 생깁니다. 물은 언제 어느때라도 담기는 그릇에 따라서 그 모양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세상살이도 그처럼 조건과 시간과 공간에 맞게 인연을 따를 때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도덕경에서 노자가 말씀하신 '순리에 따를 때, 거침없게 된다.'는 말씀이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