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여기 칼이 있습니다. 이 칼은 흉기일까요? 아닙니다. 이 칼은 흉기가 아니라 수술실에서 사람을 살리는 데 쓰는 도구입니다. 그러면 이 칼은 유용한 도구입니까? 아닙니다. 이 칼은 사람을 다치거나 죽게 만드는 흉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칼은 유용한 도구도 아니고 흉기도 아닙니다. 칼은 본래 공입니다. 칼이 본래 공하므로 어리석은 사람이 잡으면 흉기가 되고 의로운 사람이 잡으면 사람을 살리는 보배의 검이 됩니다.

한 생각에 사로 잡혀 있으므로 중생이고, 한 생각 돌이키면 그는 이미 부처입니다. 마음이 깨달으면 부처요, 마음이 어리석으면 중생입니다.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지 않으니 다 일심에서 일어나는 모습입니다.

 

칼이라는 한 가지 사물이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를 모두 의미할 수 있다. 둘 다 같은 칼인데, 괜히 사람의 분별을 해 놓은 것이다. 칼은 처음부터 그냥 칼일 뿐이다. 어떤 일어난 일도 좋고 나쁨이 없다. 그냥 일어난 것인데, 사람이 행운이니 불운이니 분별을 할 뿐이다.

 

22.

만일 내가 한 법도 정해져 있지 않음을 알고 나라는 고집을 완전히 버린다면, 나는 그 무엇도 정해진 바가 없는 까닭에 오히려 무엇이든지 될 수 있습니다. 텅 빈 그릇에는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전체에서 바라보면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고 있다고, 그것이 마치 자기만 아는 값진 지식인 것처럼, 절대 법칙, 자신만의 규칙인 것처럼 그것에만 의지하는 것은, 그저 작은 지식에 집착함으로써, 더 큰 앎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다.

 

고정관념과 고집을 놓아버릴 때, 그의 존재는 현재의 환경 속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상황은 이미 일어났다.'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명제입니다.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한 상황이 지금의 내 현실입니다. '다른 사람과 결혼했으면 좋았을걸'하고 생각한들 모두 번뇌에 불과합니다. '나는 저 사람과 맞지 않아'하고 고집하는 마음은 불행을 자초합니다. 세상에 나와 맞지 않는 사람, 나와 맞지 않는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와도 맞추어 살 수 있습니다.

 

어렵게 배운, 깨친, 경험한 지식도, 그것에만 집착하고 아집에 빠진다면 그저 고정관념이고 고집일 뿐이다. 다 흘러가게 놓아야 한다. 그래야 새로이 필요한 새로운 앎이 자리하게 된다.

 

내가 처한 조건에서 나를 고집하지 않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는 그 마음이 아상을 소멸해 가는 수행입니다. 이 것이 부처의 법이며 금강경에서 설하는 가르침의 요체입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한 삶을 살아가되, 나를 고집해 잘났다거나 못났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어리석은 분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끊임없이 부딪치고 나를 고집하고 경계에 휘둘리는 일상의 순간순간을 포착해 거기에 반응하는 내 일거수 일투족을 알아차리고 마음의 뿌리를 찾아간다면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부처님의 참된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정관념과 고집을 버리고(절대적인 법칙이 없음을 알고...라고 표현해도 될지는 아직까지 모르겠음), 물처럼 머문 바 없이, 집착하는 바 없이, 모두가 하나임을 알고 분별을 버리라는 것이다. 또한 아직도 이렇게 주변에 맞추어(어쩌면 노자가 말씀하시는 순리대로 사는 것) 사는 것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한 삶"과 연결되는 건지는 매끄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다만, 그러한 말씀이 내가 사회생활을 하며, "아 저 사람은 자존심도 없나? 저 사람은 숨막혀서 어떻게 사나? 저렇게 시키는 거 다하고, 저렇게 힘든 사람을 다 맞춰주고...저렇게 까지 살아야 하나?'라고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이런 마음이었구나...라고 조금 이해되게 하는 부분은 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