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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장.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이 보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도는 뒤로 물러나는 것같이 보이고,

평탄한 도는 울퉁불퉁한 것 같이 보이고.

 

"도"는 알아보기 어려워, 뛰어난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힘써 행하려하나, 보통사람들은 진짜 "도"인지 의심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게 무슨 "도"냐며 비웃는다. 도는 상식적인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음을 말한다.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아보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도는 뒤로 물러가는 것 같아보이고, 평탄한 도는 울퉁불퉁한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설적인 특징이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도"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게 하나, 앞에서도 노자는 계속해서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이 역설이 아니며, 순리의 변화 안에서 양립할 수 있는 개념임을 말하고 있다. 또 그러한 개념은 각자의 기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므로, 상대적인 개념이며, 따라서 역설적인 것 같은 두 개념이 동시에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42장.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습니다.

 

지금까지는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것, 역설적인 상황들이 변화라는 개념을 통해 조화를 이룰 수 있고, 그런 상태가 "도"에 가깝겠구나...라고 생각해왔다. 42장을 보니,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았다고 한다. 하나에서 음, 양의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개념이 나온 것이다. 그럼 내가 생각했던 거랑 반대방향으로 생각이 흘러야 하는 건가? 원래 하나인 것에서 두개가 나오고, 셋이 되고, 만물이 되는 것이다.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개념은 하나에서 출발했다. 어떤 한가지 현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두개의 상반되어 보이는 개념이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러면 같은 것을 설명하는 데 상반된 개념이 되어버린 두 개념을 보면서, 역시나 "말" "언어"의 한계를 느낀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말로 표현된 개념들을 따지고 따지고 따지고 올라가다보면, 말로 설명하려했던 최초의 한가지가 나올텐데...그것이 "도"인가.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임금이 자신을 "고아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역설처럼 보이지만, "도"에 가까운 행동이라 말하고 있다.

 

43장.

세상에서 그지없이 부드러운 것이 세상에서 더할 수 없이 단단한 것을 이깁니다.

'없음'만이 틈이 없는 곳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무위"가 "인위", "작위"보다 강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부드러운 것이 만물을 포용할 수 있다라는 의미로도 들린다. 43장을 읽을 때, '소오강호'의 영호충의 최강검법 '독고구검'이 생각났다. 그 비밀은 '무초식', 초식이 없다는 것인데, 초식이 없으므로 그 검법을 깰 수 있는 다른 검법도 없다는 것이다. 영호충이 '독고구검'을 연마할 때 스승이 물었다. "다 외웠느냐?" "절반정도 외우고 절반정도 까먹었습니다." 한참 후 다시 연습 후 묻는다. "다 외웠느냐?" "이제 다 잊어버렸습니다." 뭐 김용 작가가 노자를 얼마나 잘 알고 있었는지는 나는 모르지만, 도가의 사상이 느껴진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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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장.

성숙한 사람은 두꺼운 데 머무르고, 얄팍한 데 거하지 않습니다.

열매에 머무르고, 꽃에 거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덕의 사람은 자기의 덕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작위, 인위가 아닌 순리에 따른 행동이었으므로, 의도하지도 의식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상덕, 하덕으로 구분하며 다시 하덕을 인, 의, 예로 구분하고 있다. 상덕은 "무위", 하덕, 인, 의, 예는 "작위, 인위"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하덕의 구분을 "인"은 그 작위의 이유, 바라는 대가가 없음, "의"는 그 작위의 이유, 바라는 대가, 의도가 있음, "예"는 그 작위, 인위를 타인에게 까지 강요하는 것으로 구분하여 표현함. 도, "우주적 원리"가 없어지면, 덕, "무위"가 나타난다. 덕이 사라지면, 유위이나 그 의도에 따라 인, 의, 예가 순서대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인은 유가를, 예는 법가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으며, 그렇다면 노자는 모든 사상을 다 알고 있었으며, 그런 사상을 다 포괄하여 이처럼 도가를 주장한 것인가. 어쨌든 예는 얄팍한 것이고, 혼란을 불러올 뿐이라며 경계하고, 근원인 도에 머물 것을 주의시킨다. 37장까지는 "도"가 주를 이루었다면, 38장부터는 "덕"경이라 하여 덕이 나온다. 마치 도>덕>인>의>예 인 것처럼 쓰여 있어 도와 덕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고민하면서, 이번 장 읽기가 많이 지연되었다. 아직도 잘 모르겠으나, "도"는 더 추상적인 원리에 가깝고, 이의 한 형태가 무위로써 "덕"인 것 같다.

+(추가) "처음 만나는 도덕경" 책을 빌려 38장만 발췌독 하였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하는 좋은 행동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고집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순간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의 갈등과 충돌이 필연적으로 야기된다. 그래서 결국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나쁜 것으로 변질되고 만다. 그러니 그것이 무엇이건 절대 고집하고 강요하지 마라.

 

39장.

지극히 영예로운 것은 영예로움이 아닙니다. 구슬처럼 영롱한 소리를 내려하지 말고, 돌처럼 담담한 소리를 내십시오.

 

모든 자연의 만물이, 자연 그대로일 수 있게 하는 무엇, 그 원리 '하나'. 지금 존재하는 모습은 다르나 지금 존재 일 수 있게 하는 근원에는 단 하나의 근원이 있다. 모든 높은 것, 귀한 것도 다 근원에서 시작하였으니, 근원을 잊으면 안된다. 지금 모습도 근원의 무한한 가능성 중 하나가 발현된 모습으로, 우리는 근원의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모습을 경외하고, 오히려 한 가지 능력이 발현된 지금은 오만을 경계해야 한다.

 

40장.

온 세상 모든 것 "있음"에서 생겨나고, 있음은 "없음"에서 생겨났습니다.

 

순환의 원리를 말하고 있으며, 그 우주적 원리인 "순환"이 어떤 강한 작위나 인위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의식조차 할 수 없을만큼 작은 변화가 쉼없이 이루어짐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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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장.

도는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써도 다함이 없습니다.

 

도를 지키면 모든 게 순리대로 이루어지고, 해로움이 없이 오직 평화롭다. 그러나 도는 음악이나 별미와 달리 좋다고 느껴지지 않아 굳게 잡기가 어렵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이분법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던 부분까지 보게 된다면 써도 다함이 없는 무궁무진한 도의 참 뜻을 알게 된다.

 

36장.

오므리려면 일단 펴야 합니다. 약하게 하려면 일단 강하게 해야 합니다.

패하게 하려면 일단 흥하게 해야 합니다. 빼앗으려면 일단 줘야 합니다.

이것을 일러 '미묘한 밝음'이라 합니다.

 

계속하여 노자가 말하고 있듯이 오므림과 핌, 약과 강, 폐와 흥  등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고, 변화의 과정에서 하나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순환의 원리를 아는 것이 미묘한 밝음이며, 우리는 이때 초연해지고 의연해질 수 있다. 인위나 작위없이 이러한 원리에 따르는 것이 부드러운 것이다. 마지막 구절 "나라의 날카로운 무기도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됩니다"에서는 韜光養晦가 떠올랐다.

 

37장.

도는 언제든지 억지로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 된 것이 없습니다.

 

도는 순리에 따르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일이 없으나, 순리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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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장.

이름이 생기면 멈출 줄 알아야 합니다. 멈출 줄을 알면 위태롭지는 않습니다.

이를테면, 세상이 도로 돌아감은 마치 개천과 계곡의 물이 강이나 바다로 흘러듦과 같습니다.

 

계속하여 "무위"의 치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으며, 인위, 작위 없이 순리에 따라 다스린다면 마치 개천과 계곡의 물이 강이나 바다로 흘러들어가듯이 자연스럽게 저절로 순복하게 될 거라고 말하고 있다. 28장에서 "다듬지 않는 통나무"를 마름질하면 그릇이 되고, 성인은 이를 사용하여 지도자가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30장과 31장에서 목적을 이룬 군주는 더 나아가지 않고, 군림하려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순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다듬지 않은 통나무를 다듬어 목적을 달성하였다면 이제 더이상의 작위를 멈추고, 물이 바다로 흘러가듯, 다시 "도"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33장.

남은 아는 것이 지혜라면, 자기를 아는 것은 밝음입니다.

남을 이김이 힘있음이라면, 자기를 이김은 정말로 강함입니다.

 

남을 아는 것보다 자기를 아는 것이 진짜 지혜이고, 남을 이기는 것보다 자기자신을 이기는 것이 정말로 강함이다. 만족할 줄 알면 그 것이 진정한 부유함인데, 거기서 더 강행한다면 인위적인 것이다. 지금의 자리를 잃지 않으려고, 머무르려고 하는 것은 그저 오랠 뿐이고, 진정한 "수"를 누린다 함은 인위적으로 멸망하지 않고, 순리에 따라 죽는 것이다.

 

34장.

언제나 욕심이 없으니 이름하여 '작음'이라 하겠습니다.

온갖 것 다 모여드나 주인 노릇 하려 하지 않으니 이름하여 '큼'이라 하겠습니다.

 

"도"는 어디에나 존재하며, 분별이 없고, 어떠한 규칙이나 기준에 얽매이지 않는다. 다만 천성이 그러할 뿐. 따라서 온갖 것 다 품을 수 있고,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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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장.

도로써 군주를 보좌하는 사람은 무력을 써서 세상에 군림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도"의 길은 작위와 인위를 피하는 것인데, 가장 큰 작위는 무력과 전쟁임을 환기하며, 경계하고 있다. '무위'는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다. 작위적인 것을 안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자연스러운 행동은 하는 것이다. 쳐들어오면 방어하는 행동 등. 자연스러운 행동까지 무위이고, 그 이후에 그 승리를 발판으로 군림하거나 더 나아가는 순간 작위가 된다. 또한 '物極必反, 무엇이나 기운이 지나치면 쇠하게 마련,'이므로, 일시적인 목적 달성으로 교만해지거나 뽐내지 않을 것을 당부한다.

 

31장.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물건, 군자가 쓸것이 못 됩니다. 할 수 없이 써야 할 경우 조용함과 담담함을 으뜸으로 여기고 승리하더라도 이를 미화하지 않습니다.

 

30장에 이어 계속하여, 무력을 통한 인위적인 목표달성을 경계하고 있다. 인위적인, 무기, 무력을 이용한 목표달성은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반작용을 수반하므로 일시적일 뿐이다. 우주의 큰 흐름에 따라 순리대로 무위로 이룬 것만이 영원할 수 있다. 철로 된 무기만이겠는가. 수확량 증가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농약사용 등의 인위적인 방법들은 오히려 내성이 생긴 강한 해충을 만들어버렸고, 벌목 등 무분별한 개발은 생태계 파괴 및 많은 동식물들을 멸종시켜, 이제는 인류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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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장.

흰 것을 알면서 검은 것을 유지하십시오.

 

남성과 여성, 흰 것과 검은 것, 영광과 오욕, 반대되는 양립할 수 없는 개념같지만, 노자는 계속해서 양립가능하며, 이분법적 사고를 탈피할 것을 말한다. 그러면 갓난아기, 무극, 다듬지 않는 통나무로 표현되는 "도"에 가까워지는데, 진정한 "도"는 작위, 인위를 내려놓는 것이다.

 

29장.

세상은 신령한 기물, 거기다가 함부로 뭘 하겟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인상적인 장이다. 28장까지 읽으면서 너무 감명깊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모든 인위적인 요소를 다 내려놓는다면, 좋은 대학을 가려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회사에 가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승진하고 가족을 부양하려 더 열심히 일하고 이런 것들이 다 부질없다는 건가? 모두들 다 그리 살고 있는 이 상황에서 나만 고고한 한 마리 황새처럼 다 내려놓으란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노자가 계시다면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이 장에서 조금 이해가 되는 듯 하다. 그러한 노력도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사심없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物極必反... 모든 것에 다 순리가 있으니. 차분한 마음, 의연함과 초연함으로 허공에 가득한 도의 큰 흐름과 리듬을 알고 거기에 순응하겠다는 겸손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도덕경을 읽기 시작한 후, 좀 착해진 것 같다 ㅋㅋ 일상생활에서 화가 나는 상황이 줄어들었음을 느낀다.(물론 내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느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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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장.

가볍게 처신하면 그 그본을 잃게 되고, 조급히 행동하면 임금의 자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하루종일 무거운 짐을 끌고 다니다 화려한 경관을 보았을 때, 짐을 내려두고 풍경에 심취할 것이다. 그러나 성인은 무거운 짐수레나 화려한 경관이나 어떤 선호가 없이 의연하고 초연할 뿐이다. 경관이더라도, 짐을 짊어진 채, 보이는 대로 바라보고 즐길 뿐이지, 애써 더 자세히 보려 짐을 내려 놓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왕 역시 나라 곳곳의 모든 사안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판단하고, 의연하고 초연해야 17장에서 말한 존재정도만 알려진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모든 현상의 양면성을 볼 수 있다면, 의연하고 초연할 수 있고, 성급하거나 가볍게 처신하지 않게 된다.

 

27장.

정말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은 달린 자국을 남기지 않습니다.

 

달린 자국, 흠이나 티, 계산기, 빗장, 졸라매기 등은 인위로 더 잘해보려 노력한 흔적들이다. 성인은 이런 인위가 없으므로 그 행동 자체가 "도"에 가깝게 되고,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을 차별없이 초연하게 대할 뿐이다. 즉 선함이 선하지 못함 없이는 존재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두 개념의 우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차별한 것임을 안다.

 

어렵다, 어렵다, 어렵다...ㅜㅜ 그래도 이렇게 뜻깊은 글귀를 매일 읽고 감상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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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가방에 여러가지 책을 넣고 다니는데, 표지가 고무재질로 된 다이어리와 맞물려 표지가 살짝 구겨졌다...ㅜㅜ(읔..내 책...)

 

일단 책 제목이 너무 멋있다 ㅋㅋ "13억분의 1"이라니...

말그대로 13억분의 1의 남자시진핑총서기가 되기까지의 비화(?)가 일본인 기자의 시선에서 쓰여져 있다.

 

시진핑의 일대기는 아니고, 장쩌민, 후진타오, 리커창, 보시라이 등 쟁쟁한 인물들 간의 정치적 술수와 음모 사이에서 시진핑이란 남자가 선택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내용은 거의 소설처럼 술술 읽힌다. 삼국지나 초한지를 읽는 느낌도 있고, 중국은 원래 이런 모략과 술수가 넘쳐나는 나라인가..라고 한번 웃고 소설처럼 재미있게 읽어 내려갔다.

 

동양고전의 나라답게 읽는 동안, 중국의 많은 고전의 문구들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많다.

1997년 당대회에서 서열 344위이던 시진핑은, 준비된 후계자였던 리커창을 2007년 당대회에서 역전한다. 시진핑 6위, 리커창 7위. 10년 동안 둘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중국은 정말 재미있는 나라인 것 같다. 초한지를 읽으면서도 정말 아무 능력도 없는 동네 건달 유방이, 명문가 출신의 위대한 장군이었던 항우를 이긴 것도 정말 의아했는데,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영화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은퇴 후에도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려했던, 올드보이들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권력싸움이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자신들의 라인을 후계자로 만들고 싶어했으나, 서로의 후계자를 흠내는 사이 시진핑이 부각된 것이다.ㅋㅋ 자기 자신만의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천운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도덕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시진핑은 아무것도 하지않는 것처럼 보이고, 우둔해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런 흐름을 읽어내고 준비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안하고 우둔해보이던 사람이, 두 노련한 올드보이들의 욕심을 이용해 결국 둘다 꼼짝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장면에서는 그의 엄청난 카리스마와 내공이 느껴진다.

 

보시라이 사건도 진짜 중국소설 같은 내용이었다. 특히 그의 아내의 끔찍한 만행은 한고조 유방의 아내인 여치를 바로 떠올리게 할 정도로 끔찍했다. 정말 소설같았다. 대륙의 스케일인가.. 

 

곳곳에 일본인 기자인 저자의 일본중심적 사고가 좀 거슬리기도 하였지만,(총서기가 되려면 일왕을 만나야한다는 늬앙스나, 센가쿠 관련 자국 옹호 늬앙스...) 시진핑이란 남자와 중국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책이었다.

 

작년에 중국어를 공부할 때, 후배가 중드 "랑야방"을 추천해준 적이 있는데, 이 기회에 한번 봐야겠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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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자연입니다.

 

5장에 "말이 많으면 궁지에 몰리는 법"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인식 자체도 부족하지만,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더 많은 제한을 갖고 있음인데...결국 말을 할수록 더 부족해지게 되고, 한(限)이 없는 지혜인 도와 멀어지게 된다는 것 같다.

 

24장.

발끝으로 서는 사람은 단단히 설 수 없고

 

발끝으로 선다거나 다리를 너무 벌리고 걷는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작위적인 행동이다. 이런 작위로 인해 단단히 설 수 없고, 걸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특히 뽐내려 하고, 자랑하려 하는 태도는 더욱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요즘은 정말이지 너무 피곤하다. 갑의 위치에선 갑질한다고 민원들어올까봐 마음 졸이고, 을의 위치에선 갑한테 찍힐까봐 마음 졸이고... 아무것에도 비교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소박하고, 충실하게 묵묵히 살아가자고 말하는 것 같다. 자연스러우면, 무엇에도 거침이 없게 된다.

 

25장.

나는 그 이름을 모릅니다. 그저 '도'라고 불러 봅니다.

 

분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노자가 경계시하고 있는 이분법적인 인식에 대한 반대적인 표현으로서 조화를 이루었다고 말하는 것 같다. 만물의 시원이며, 감각으로는 인식할 수 없으며, 제한이 없이 거침없고 늘 어디에나 존재한다. "도"라는 개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나 굳이 표현하여 "도"라 부르는 것이고, 그 성질을 설명하자면 크다. 말로는 언제나 한계가 있는 법, 크다는 말로서 "도"를 표현하기에 한계가 드러나는 것이.. 큰 것은 도, 하늘, 땅, 임금 이렇게 4개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땅을, 땅은 하늘을, 하늘은 도를 본받는다. 크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도는 "스스로 그러함" 자연스러움을 본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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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

세상사람 모두 총명한데 나홀로 아리송하고, 세상사람 모두 똑똑한데 나홀로 맹맹합니다.

 

오강남 선생님께서 내가 말하고 싶었던 바를 정확히 표현해주셨다. 이분법적 상식의 세계를 초월한 "초이분법적 의식세계", 그리고 그 경지에 달한 사람들의 "실존적 고독". ㅋㅋ뭔가 엄청 어려운 단어다 ㅋㅋ 그리고 계속하여 갓난 아기 비유가 등장하는데, 세상에 태어나 눈, 코, 입, 귀, 촉을 통해 습득하는 작은 지혜들로 인한 편견이 없이, 즉 이분법적 상식을 가지고 있지 않던 갓난 아기시절을 강조하는 것 같다.

 

21장.

황홀하기 그지없지만 그 안에 형상이 있습니다.

황홀하기 그지 없지만 그 안에 질료가 있습니다.

그윽하고 어둡지만 그 안에 알맹이가 있습니다.

 

21장은 너무 어려웠다. 오강남 선생님 해설만으로는 이해가 어려웠고, 다른 검색을 해보니, 황홀(恍惚)이란 단어의 해석에서 많은 차이가 생겨나는 것 같다. 오강남 선생님은 말그대로 ecstatic, 우리가 황홀하다고 말할 때, 그 의미를 그대로 사용하여 해석하셨고, 어떤 분들은 恍(어슴프레하다, 흐릿하다), 惚(희미하다, 모호하다) 의 뜻으로 해석하여 황홀을 "모호하다"란 의미로 해석하였다. 이 경우 해석이 더 쉽게 된다. 모호하지만 형상이 있고, 질료가 있고, 알맹이가 있다는 것이다. 도는 감각에만 의지하면 없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으나, "예부터 이제까지 이름이 없은 적 없다." 즉, 실재한다.

 

22장.

휘면 온전할 수 있고, 굽으면 곧아질 수 있고

 

오강남 선생님 풀이대로, "휘어짐"과 "온전함", "굽음"과 "곧음", "파임"과 "채움", 헐다"와 "새롭다", "적음"과 "많음"이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과정을 통해 두 개념은 충분히 양립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성인은 치우치지 않고 사물을 "하나"로 파악하므로 "세상의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계속해서 대립되어 보이는 개념들이 하나이고, 양립가능함을 말씀하고 계신 것 같다.

 

ㅋㅋ일독과 이독을 읽은 후, 요즘 또콩이한테 "논어"를 한 줄씩 읽어주는데, 이런 내용이 나왔다. "도에 뜻을 두고, 덕에 의거하며, 인에 의지하고, 예에 노닐지어다(, , , .)"

물론 노자와 공자가 말한 도는 완벽히 같지 않겠지만.. 공자님도 "도"를 중요시하셨구나,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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