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아주 유명하신 홍정욱 님의 7막7장을 우연한 기회에 이제야 읽었다.


유명 배우의 아들, 하버드, 국회의원, 코리아헤럴드 사장 등 워낙 유명하기에 잘은 모르지만서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이외에도 알고 보니 내가 이마트가면 애용하는 올가니카 착즙쥬스 회사 사장이고, 내가 교보문고에서 애용하는 올재재단의 이사장이셔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올가니카 착즙쥬스는 가격이 좀 있지만 품질이 좋아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있고, 올재재단의 고전들은 뭐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독자들이 출판을 기다리는 재단이다.


그는 어떤 사람이기에 지금 이런 길을 걸어오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이 책은 1993년에 그의 유학생활까지의 삶을 그의 삶의 2막까지로 비유하여 써낸 자서전 같은 에세이다. 그리고 2003년에 그 후 10년간의 짤막한 이야기를 덧붙여 출판한 개정판이다.


읽은 소감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란 느낌과 너무 완벽하여 오히려 인간미가 약간 부족한 느낌이다.

(개정판을 냈을 때가 지금의 나보다 젊은 나이다 ㅎㅎ)


책의 2막까지 내용이나, 이후 언론사 인수, 국회의원의 삶까지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을 롤모델로하여 달려온 그의 삶은 정말 한치의 오차도 없는 조각같다.

 

알려진 바와 같이 배우 남궁원의 아들이지만, 책 속에서는 그의 어머니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의 유학생활에는 물심양면으로 어머니의 헌신적인 원조가 있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어머니가 다 그럴 것이고, 나 역시 오직 나의 교육을 위해 올인하셨던 나의 어머니가 생각이 났다.


그의 방대한 독서량에서 비롯된 수많은 인용과 풍부한 표현이 그의 지식에 감탄하게 하며, 한편으로 절로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그는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많은 것을 경험한 것인지... 23살 나이에 이런 표현을 싫기도 한다.


모든 일에는 어찌 그리 합당한 이유와 목적이 있는 것인지 

아, 삶의 구석구석이 경이롭지 않을 수 없다.


그의 7막에는 어떤 이야기가 적힐 것인지.


하늘의 명과 인간의 명을 헤아리는 지혜를 주소서.

삶과 삶이 지닌 모든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멈추지 않는 삶이게 하소서.

제 뜻이 당신의 택함 속에 있게 하소서.




반응형

6.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강을 건너고 나면 뗏목을 버리고 길을 가야 하듯, 부처님은 불법 역시 집착할 바가 못된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법조차 집착하지 않고 놓아버려야 하거늘 법 아닌 것, 내 생각이나 고집, 재물이나 명예, 권력 따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나를 통과하여 흘러가거나, 내가 모든 것을 통과하거나 흘러가는 것... 집착하거나 소유하려하지 말 것.

 

내가 주인이 되면 내가 세상을 움직일 수 있으나, 상에 집착하면 그 상이 나의 주인이 됩니다. 상에 집착하는 것은 나를 꽁꽁 묶어 스스로를 구속하는 일입니다. 상을 여의는 것, 그것이 내 인생의 자유를 활짝 열어주는 불법의 길입니다.

 

상에 집착해 있는 '나'로부터 벗어나는 것. 살면서 경험을 하고 공부를 하고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기 위해 문자로서, 글로서 정리를 하고 외우는데...정작 그러한 행위가 더 나를 속박하고 현재에 집착하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

 

아직 많이 읽지 않았지만, 중고등학교 때 국사시간에 배웠던 기복신앙으로서의 불교가 아닌, 정말 심오한 철학임을 느끼고 있다.

 

 

반응형

5.

내 것이라는 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보시는 '내가 그에게 내 것을 주었다'는 마음으로 남습니다. 거기에서 보상 심리가 싹트고, 그 싹이 자라 원망과 배신감의 열매를 맺습니다. 하지만 실상으로 본다면 본래 내 것이 없으므로 우리는 아무런 기대 없이 무주상보시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상에 집착하지 않고 행한 보시, 보시했다는 생각 없이 행한 보시의 복덕은 한량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상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상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비로소 세상의 참모습을 보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내가 지금 지향하는 목표, 지금 내 삶의 기준, 지금 내 눈에 그럴 듯해 보이는 형상이 마치 불변의 최고 가치인 양 매달려 살아가는 게 사람들의 삶입니다. 이렇게 상에 집착하면 괴로움의 씨앗이 뿌려져 그 누구도 과보를 피하지 못합니다. 상이 허망함을 깨치고 모든 형상의 집착을 뛰어넘어야만 부처의 도리를 알고 자유와 행복의 참맛을 볼 수 있습니다.

 

그대가 사라져 버릴 내 몸을 보았다 한들 대체 그것이 뭐란 말입니까. 박칼리여, 사물의 참다움을 보는 자는 나를 볼 것이요, 나를 보는 자는 사물의 참다움을 보는 것입니다.

 

좋고 나쁨을 구분하는 기준, 문제라고 판단하는 기준은 다 내 생각일 뿐입니다. 그 사실을 깨달으면 괴로움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본래 나쁜 것도 없고 본래 좋은 것도 없는 줄을 알면, 좋고 나쁘다는 상으로 생긴 온갖 시비와 갈등이 사라집니다.

 

일체 모든 것에 대한 구분이 없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반응형

70장.

성인은 굵은 칡베 옷을 입지만, 가슴에는 구슬을 품고 있습니다.

 

"도"는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보아야하므로, 범인은 이해가 어렵다.  노자께서 계속 상반된 개념이 하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범인들에게는 그저 역설일 뿐이다. 이분법적 세계를 초월하여 합일의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성인은 오히려 범인들에게는 이상해보이고, 배척당할지 모르나, 안에는 '구슬'을 품고 있다.

 

71장.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이 가장 훌륭합니다.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하는 것은 병입니다.

 

범인은 초이분법적인 도를 알기 어렵다. 따라서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이 범인 중에서는 가장 훌륭하다. 모르면서 안다고 착각할 때, 인위, 분별이 생기면서 순리에 어긋나게 되고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집착하게 되는 것, 즉 병인 것이다. 성인은 순리에 어긋나는 법이 없다.

 

72장.

사람들이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더욱 큰 두려움이 이를 것입니다.

 

"도"로서 통치하는 법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 같다. 백성들이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자신이 '도'를 모른다는 사실인데, 그것이 아니라 '통치자'를 두려워하게 될 경우, 이는 잘못된 통치이며, 어떤 더 큰 존재에 의한 더 큰 두려움이 닥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순리대로 살 수 있게 해야하며, 성인 '통치자'는 스스로를 드러내거나 치켜올리는 등 인위나 작위를 하지 않는다.

반응형

68장.

훌륭한 무사는 무용을 내보이지 않습니다. 훌륭한 전사는 성내지 않습니다.

훌륭한 승리자는 대적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고용인은 스스로를 낮춥니다.

 

훌륭한 무사는 무용을 인위적으로 뽐내지 않고도 상대방을 이기고, 훌륭한 전사는 인위적으로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상대방을 이기며, 훌륭한 승리자는 인위적으로 경쟁하지 않고 상대방을 이기며, 훌륭한 고용인은 지배하려하지 않고 스스로를 낮추어 통치를 한다. 도는 인위나 작위없이 자신의 목적을 쟁취하는데, 그것은 모든 것이 원래 하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네가 이기는 것이 곧 내가 이기는 것이므로 인위적인 행동이 필요하지 않다.

 

69장.

내 편에서 주인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손님노릇을 하고, 한치 전진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한자정도 물러서라는 것입니다.

이를 일러 나아감이 없이 나아감, 팔이 없이 소매를 걷음, 적이 없이 쳐부숨, 무기없이 무기잡음이라 합니다.

 

인위나 작위 없이 자신의 목적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물처럼 자신을 낮추고, 자애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존중하는 것이다. 이기는 쪽에서 슬퍼하는 이유는 상대방과 내가 원래 하나이므로, 상대방이 졌다는 것은 나 또한 잃은 것이 있다는 뜻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다.

반응형

4.

 

보시를 행하되 집착없이, 머문 바 없이 하라.

 

상대에게 기대를 많이 하면 할수록 상대가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내 마음이 춤출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 사이의 갈등은 이해관계와 그로 말미암은 기대감 때문에 생깁니다.

 

상대에게 베푸는 것으로 내 할 일은 모두 끝났다는 마음, 베풀었다는 생각마저 없이 행하는 보시는 내가 행복해지는 길이며 번뇌를 소멸하는 길입니다.

 

빚을 갚는 사람과 같은 자세가 바로 무주상보시의 마음입니다. 마치 빚갚는 마음으로 '원래 당신 것이니 도로 가져가시오'하는 마음으로 베풀 때, 양보했다는 상을 버리고 양보할 때, 비로소 상대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해집니다.

 

남의 도움을 받는 사람은 그만큼 종속된 삶을 살게 됩니다.

 

원래 당신 것이니, 도로 가져가시오.. 원래 다 하나이니,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것은 내가 도움이 필요한 것이고,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돕는 것은 나를 돕는 것이다.

반응형

3.

중생은 자기 뜻대로 일이 되지 않으면 괴로워합니다. 남편이 돈을 못 벌어서, 자식이 공부를 못해서, 부모가 이혼을 해서, 친구가 배신을 해서 등등 갖가지 이유를 대며 괴로워 합니다. 이는 세상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괴롭다는 뜻이지요. 내가 괴로운 이유가 하나같이 다 다른 사람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나보다 힘이 센 존재,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단번에 해결해 줄 수 있는 존재, 즉 신이라는 존재에 매달려 제 뜻을 이루게 해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머리가 쿵! 했다. "내가 괴로운 이유가 하나같이 다 다른사람 때문"...그렇네...왜 그래야 하는거지? 나는 나인데, 왜 나의 괴로움은 항상 내가 아닌 밖에서 오는 것일까.

 

나의 괴로움이 남편이 술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자기 생각'에 집착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게 문제 해결의 핵심입니다. 남편이 술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그 마음만 놓아버리면 남편이 술을 더 먹는다고 해서 실망할 것도 없고 덜 먹는다고 해서 좋아할 것도 없습니다.

 

'술이 보약'이라는 말은 남편을 나한테 맞춰 바꾸려 하지 말고 남편 입장에서 그를 대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이 술상을 차려주는 일로 표현되는 것이고, 그렇게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가 행복하고 기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한 공덕은 내 마음을 바꿈으로써 이미 다 받았습니다. '내가 남편을 구제했다'든가 '남편은 아직 구제되지 않았다'는 생각은 여전히 상대에게 내 삶을 얽어매 놓고 종속시키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생각은 언제든 또 다른 괴로움을 불러옵니다.

 

흔히 뱀을 보고 징그럽다 하고 돼지를 보고 더럽다고 하지만 실제로 뱀이나 돼지가 그런 성질을 가진 건 아닙니다. 내가 한 생각을 일으켜 그런 식으로 고정관념을 만들어놓고 마치 그 존재가 그런 것인 양 착각하는 것입니다.

 

나와 너를 경계짓는 마음만 사라진다면 세계는 있는 그대로 하나입니다. 본래 경계가 없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을 울리는 문구가 너무 많아 인용이 대부분이며, 내가 느끼는 바를 말로 표현하기에는 본 내용이 너무나 크고, 또 감히 그러할 수도 없다. 세계는 있는 그대로 하나이며, 본래 경계가 없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지금 같이 읽고 있는 도덕경에서 노자가 말씀하시는 바와 많이 유사한 것 같다. 다만, 노자는 그러한 도를 통해 통치하여, 세상을 순리대로 흘러하게 하라하며, 부처께서는 더 많은 중생을 구제하라 하신다.

반응형

2. 

금강경에 그려진 부처님의 행색은 마치 거지에 불과합니다. 다 떨어진 옷을 입은 채 발우 한 개 들고 이 집 저 집 밥을 동냥하는 부처님, 제자들과 함께 얻어 온 밥을 나눠 먹는 부처님, 식사를 마치고는 손수 가사와 발우를 정리하는 부처님. 이렇게 부처님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 부분을 읽을 때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가 "고타마"를 처음 보았을 때 묘사한 구절이 생각났다. 공양을 얻기 위해 수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걸어가는 평범한 모습이었는데, 싯다르타는 그 모습안에서 그분이 "고타마"임을 한번에 알아챘다. 부처님께서 이러한 지극한 평범한 속에서 깨달은 자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평범 속에서 부처님께서 말하려 하는 것은 무엇일까.

순간순간 바뀌는 마음의 변화는 모두 눈, 귀, 코, 혀, 몸, 뜻의 육근이 경계에 따라 일어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코로 맡는 냄새, 입으로 느끼는 맛, 손으로 느끼는 감촉, 머리에 일으키는 생각에 따라 순간순간 좋고 싫음을 구분합니다.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해선 매순간 변하는 감각에 의지한 좋고싫음에 대한 구분을 멈춰야 한다.
반응형

66장.

강과 바다가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 낮추기를 잘하기 때문입니다.

백성위에 있고자 하면 말에서 스스로를 낮추어야 하고, 백성 앞에 서고자 하면 스스로 몸을 뒤에 두어야 합니다.


겸손은 수단이나 목적이 될 수 없고 누가 겸손해지고 싶다 하여 겸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물이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 그 본성 때문이지, 어떤 외부적 목적을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애쓰는 것이 아니듯 말이다. 오강남 선생님은 이렇게 아무런 사심이 없이 진정으로 자기를 낮추면 ‘결과적으로’ 자연히 위에 오르게 되고, 진심으로 자기를 뒷자리에 놓으면 ‘결과적으로’ 자연히 앞에 앉게 된다고 말씀하고 계시다.


67장.

세상 모든 사람 이르기를 나의 도는 크지만 쓸모 없는 듯하다고 합니다. 크기 때문에 쓸모없는 듯한 것입니다. 만약 쓸모있었으면 오래전에 작게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내게 세가지 보물이 있어 이를 지니고 보존합니다. 첫째는 자애, 둘째는 검약, 셋째는 세상에 앞서려 하지않음 입니다.


큰 도는 너무 커서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엔 오히려 쓸모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런 도의 기본 원리로 자애, 검약, 세상에 앞서려 하지않음의 세 가지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언제나 처럼 상반되어 보이는 개념을 이어서 말씀하신다. 자애때문에 용감해질 수 있고 검약때문에 널리 베풀 수 있고 세상에 앞서려 하지 않기 때문에 큰 그릇들의 으뜸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누구보다 용감하므로 자애로울 수 있고, 누구보다 널리 베풀 수 있기 때문에 검소한 것이며, 누구보다 앞 설수 있으므로 겸허히 누구보다 뒤에 있는 것이다.

반응형

63장.

함이 없는 함을 실천하고, 일함이 없는 일을 실행하고, 맛없는 맛을 맛보십시오.

큰 것을 작은 것으로 여기고, 많은 것을 적은 것으로 생각하십시오. 원한을 덕으로 갚으십시오.

 

계속하여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개념들은 "도"의 세계에서는 하나이다. 그러니 큰 것을 작은 것으로 여기고, 많은 것을 적은 것으로 여기라고 하는 것 같다. 좀 더 실생활에 적용하면, 큰 일도 작은 일들로 이루어져 있고, 작은 일이 큰 일이 되는 것이므로, 작은 일부터 하나하나 신중치 처리하면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말 같다. 또 큰 일을 작은 일로 보고, 작은 일일때부터 하므로, 큰 일을 쉽게 이루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은 작은 일도 작게 보지 않고, 어렵게 여기고 크게 보는 것이다.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 원한이 어찌보면 원한이 아니고 은혜일 수 있고, 어찌보면 덕으로 갚는 것이 진정한 복수일 수 있고...노자의 큰 그릇에 감탄하게 된다.

 

64장.

억지로 하는 자 실패하기 마련이고, 집착하는 자 잃을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성인은 하지 않음으로 실패하는 일이 없고, 집착하지 않음으로 잃는 일이 없습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자연스런 이치를 까먹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처음부터 대단한 결과를 노린다거나, 그러한 이유로 거대한 계획을 세워 처음부터 미루고, 실패한다거나....ㅜㅜ 도에 따라 살면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억지로 하는 자 실패하기 마련이고, 집착하는 자 잃을 수 밖에 없다. 분수에 맞지 않는 목표를 세우고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순리에 맞지 않아 실패하고 잃을 수 밖에 없다. 순리에 따를 때, 마지막까지 평정심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인은 욕심을 없애려는 욕심만 있고, 온갖 것의 본래적인 자연스러움을 도와 줄뿐 억지로 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65장.

옛날 도를 잘 실천하던 사람은 사람을 총명하게 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어리석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을 다스리기가 어려운 것은 아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강남 선생님은 일단 이 장이 말하는 바가, 독재정치의 우민화와는 다르다고 주의하고 있다. 독재야 말로 가장 인위적인 것이므로. 내 생각에는 순리에 따라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욕망적, 인위적 지혜들을 멀리하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 놓은 제도들이 최조 제정 취지와는 다르게 시간이 지날 수록 변질되는 경우 들을 경계하게 한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