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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장.

도(道)는 모든 것을 낳고, 덕(德)은 모든 것을 기르고, 물(物)은 모든 것을 꼴지우고, 세(勢)는 모든 것을 완성시킵니다.

 

그러면, '나'란 존재는 도가 낳고, 덕이 기르고 물과 세에 의해서 완성되었거나, 완성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마치 나는 나의 근원을 잊고, 태어난 이후 접한 물과 세가 마치 나인 것처럼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더욱 나의 근원에는 도와 덕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세상만물이 도와 덕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순리가 아니라 생각하면 언제든 나의 근원인 "도"로 돌아가 순리에 따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즉, 언제든 내가 습득한 지식, 경험을 비우고 매순간 완전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52장.

세상 만사에는 시작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의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를 알면, 그 자식을 알 수 있습니다.

 

'도'를 알면, 만물을 있게 한 '도'를 알면, '만물'을 알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현재 결과물을 보고 원인이 있었음을 알 뿐이고, 이는 진짜 근원이 아니다. 우리의 인식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진짜 어머니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진짜 어머니 '도'를 알기 위해서는 입, 코, 귀 등의 감각기관을 닫아야 한다. 우리의 한계가 있는 인식으로 무언가를 해석하려는, 특히 이원론적 의식을 멈출 것을 말하고 있다.

 

53장.

내게 겨자씨만한 앎이 있다면, 대도의 길을 걸으며, 이에서 벗어날까 두려워하리이다.

대도의 길이 그지없이 평탄하나 사람들 곁길만 좋아합니다.

 

화려한 조정과 잡초가 무성한 밭, 텅빈 곳간과 비단옷 이런 상반되는 상황은 사실 다 하나이고, 변화를 통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마치 지금 그 순간이 자기 것인양 즐기는 것이 도둑이 아니고 무엇이겠냐고 묻고 있다. 엄청난 기술진보를 이룩한 지금이나, 그때나 사람사는 사회 모습은 다 비슷한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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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장.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가는 것. 없애고 또 없애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십시오.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새로운 지식을 쌓아가는 것이나,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인식의 한계가 있는 우리의 감각으로 이해하려하고 지식을 쌓아가기 때문에, 최초의 완전한 도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동안 쌓아온 편견, 절대적이라 믿었던 지식들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강남 선생님께서는 그것을 특히 이분법적 사고라 말씀하고 계시다. 함이 없는 지경, 즉 무위에 이르면 모든 일이 순리에 따르게 되므로 되지 않는 일이 없게 된다.

 

49장.

선한 사람에게 나도 선으로 대하지만, 선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선으로 대합니다. 그리하여 선이 이루어집니다.

 

성인에게 고정된 마음이 없다는 것은 어떤 지식을 절대적이라 믿는다거나,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말하는 것 같다. 성인은 자기와 다르다고, 즉 선이 아니거나 신의가 아니라고 배척하지 않고, 다 포용한다. 모두 갓난 아기처럼 대하는 것이다. 편견, 단편적인 지식들을 배우기 이전의 상태, 가장 함이 없는 존재이다. 배고프면 울고, 졸리면 자고, 좋으면 웃고. 어떤 것을 바라지 않고, 그냥 순리에 따를 뿐이다. 아기를 대할 때 우리는 어떠한가. 왕의 아기든, 도적의 아기든, 그 아이에게 어떤 조건이나 이해타산을 목적을 대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 역시 가장 함이 없는 상태에 있게 된다.

 

50장.

듣건대 섭생을 잘하는 사람은 육지에서 외뿔난 들소나 범을 만나지 않고, 전쟁터에서 무기의 상해를 입지 않는다고 합니다.

들소는 그 뿔로 받을 곳이 없고, 범은 그 발톱으로 할퀼 곳이 없고, 무기는 파고들 곳이 없다고 합니다.

 

죽음 역시 우주의 원리다. 변화의 원리에 따라 태어나고 또 죽는 것이다. 오강남 선생님은 우리의 삶은 이런 의미에서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기간을 소비하면서 죽어가는 것이라 말씀하신다. 죽어가는 연습도 중요하다고..주어진 삶을 성실하고 아름답게 살지만 걱에 집착하지 않는 의연함이라...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장이다. 들소, 범, 전쟁터의 죽음은 무언가 순리가 아닌 인위적인 죽음 같다. 따라서 순리대로 사는 사람은 순리대로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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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장.

화로 말하면 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허물로 치면 갖고자 하는 욕심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세상이 '도'를 따르면, 만물이 본래의 목적에 따라 순리대로 쓰여진다 또는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고 욕심을 부려 '도'를 저버리게 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만물을 본연의 순리대로의 삶이 아닌, 인위적인 삶을 살게하여 힘들게 한다. 어디서 읽었는지 잊어버렸는데, 누군가 이렇게 말했었다. 현대사회 사람들은 젊을 때는 돈을 벌기 위해 건강과 젊은 육체, 시간을 탕진하는데, 나이가 들어서는 건강과 젊은 육체, 여가를 회복하는 데에 모든 돈을 쏟아 붓는다고. 정말 아이러니 한 상황이다. 만족을 모르면 그 욕심으로 인해 잃은 것들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똑같은 삶을 쳇바퀴 돌 듯 살게 되는 것이다. 사실 나도 잘 살고 있지 않은데,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다니..반성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다니... 정말 좋은 책을 만나게 되어 감사하다.

 

47장.

문 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다 알고, 창으로 내다보지 않고도 하늘의 도를 볼 수 있습니다.

 

진정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밖으로는 무엇을 더 배우려기보다는 자기자신부터 알아야 한다는 의미인 것 같다. 자기자신이 곧 우주이므로. 요즘 많은 도서들의 트렌드가 되고 있는 뇌가소성, 인간의 뇌가 우주보다 더 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으므로, 인간의 마지막 탐구는 우주여행이 아니라 뇌가 될거라는 책, 외향만을 쫓다보니 자기자신을 잃은 현 젊은세대, 힐링, 소확행 등으로 대표되는 현대 사회 등 노자는 이미 2000년전에 자기자신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꿰뚫어 본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만물은 순리대로 흘러가므로, 그 순리를 이해하면 방안에서도 세상만사를 다 알 수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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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장.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그칠 줄 아는 사람은 위태로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집착, 욕심은 노자도 그렇지만 기독교, 불교, 유교, 성리학 등 여러 곳에서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들이다. 그 중도가 어렵다. 어디쯤에서 만족을 하고 그쳐야하는지, 어디까지가 순리이고, 어디서부터가 집착이고 욕심인지.... 내 주식이 여기가 바닥인지, 여기가 천장인지는 바닥을 친 후, 천장을 친 후에야 알 수 있듯이...너무나 어려운 것이다. 또 중심을 잡으려면 집착이 될 수 있으니, 그냥 욕심(작위)부리지 말고 순리에 따르면서 초연한 자세가 좋을 것 같다. 이런 생각도 든다. 내가 "위"를 함에 있어, 그것의 본연의 목적에 최선을 다하고, 거기에 따라붙는 부차적인 것들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요즘은 부차적인 것을 더 우선순위에 두는 사람들이 많으니. 예를 들어 보고서를 쓴다면, 정말 경제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것이지, 칭찬을 받거나, 내가 이걸로 승진하려 하거나 등의 부차적인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팀장님과 불화가 있어도, 나는 팀장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니 평정을 찾을 뿐이다.

 

45장.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모자란 듯 합니다. 그러나 그 쓰임에는 다함이 없습니다.

완전히 가득 찬 것은 빈 듯합니다. 그러나 그 쓰임에는 끝이 없습니다.

 

계속하여 "도"가 얼핏보면 역설적인 것처럼 보이나, 그 진가는 끝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식시켜주면서, 시각, 청각 등 우리가 가진 감각만으로 "도"를 인식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늘 자신의 생각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경계하라는 말로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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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장.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이 보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도는 뒤로 물러나는 것같이 보이고,

평탄한 도는 울퉁불퉁한 것 같이 보이고.

 

"도"는 알아보기 어려워, 뛰어난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힘써 행하려하나, 보통사람들은 진짜 "도"인지 의심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게 무슨 "도"냐며 비웃는다. 도는 상식적인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음을 말한다.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아보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도는 뒤로 물러가는 것 같아보이고, 평탄한 도는 울퉁불퉁한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설적인 특징이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도"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게 하나, 앞에서도 노자는 계속해서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이 역설이 아니며, 순리의 변화 안에서 양립할 수 있는 개념임을 말하고 있다. 또 그러한 개념은 각자의 기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므로, 상대적인 개념이며, 따라서 역설적인 것 같은 두 개념이 동시에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42장.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습니다.

 

지금까지는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것, 역설적인 상황들이 변화라는 개념을 통해 조화를 이룰 수 있고, 그런 상태가 "도"에 가깝겠구나...라고 생각해왔다. 42장을 보니,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았다고 한다. 하나에서 음, 양의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개념이 나온 것이다. 그럼 내가 생각했던 거랑 반대방향으로 생각이 흘러야 하는 건가? 원래 하나인 것에서 두개가 나오고, 셋이 되고, 만물이 되는 것이다.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개념은 하나에서 출발했다. 어떤 한가지 현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두개의 상반되어 보이는 개념이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러면 같은 것을 설명하는 데 상반된 개념이 되어버린 두 개념을 보면서, 역시나 "말" "언어"의 한계를 느낀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말로 표현된 개념들을 따지고 따지고 따지고 올라가다보면, 말로 설명하려했던 최초의 한가지가 나올텐데...그것이 "도"인가.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임금이 자신을 "고아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역설처럼 보이지만, "도"에 가까운 행동이라 말하고 있다.

 

43장.

세상에서 그지없이 부드러운 것이 세상에서 더할 수 없이 단단한 것을 이깁니다.

'없음'만이 틈이 없는 곳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무위"가 "인위", "작위"보다 강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부드러운 것이 만물을 포용할 수 있다라는 의미로도 들린다. 43장을 읽을 때, '소오강호'의 영호충의 최강검법 '독고구검'이 생각났다. 그 비밀은 '무초식', 초식이 없다는 것인데, 초식이 없으므로 그 검법을 깰 수 있는 다른 검법도 없다는 것이다. 영호충이 '독고구검'을 연마할 때 스승이 물었다. "다 외웠느냐?" "절반정도 외우고 절반정도 까먹었습니다." 한참 후 다시 연습 후 묻는다. "다 외웠느냐?" "이제 다 잊어버렸습니다." 뭐 김용 작가가 노자를 얼마나 잘 알고 있었는지는 나는 모르지만, 도가의 사상이 느껴진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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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장.

성숙한 사람은 두꺼운 데 머무르고, 얄팍한 데 거하지 않습니다.

열매에 머무르고, 꽃에 거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덕의 사람은 자기의 덕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작위, 인위가 아닌 순리에 따른 행동이었으므로, 의도하지도 의식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상덕, 하덕으로 구분하며 다시 하덕을 인, 의, 예로 구분하고 있다. 상덕은 "무위", 하덕, 인, 의, 예는 "작위, 인위"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하덕의 구분을 "인"은 그 작위의 이유, 바라는 대가가 없음, "의"는 그 작위의 이유, 바라는 대가, 의도가 있음, "예"는 그 작위, 인위를 타인에게 까지 강요하는 것으로 구분하여 표현함. 도, "우주적 원리"가 없어지면, 덕, "무위"가 나타난다. 덕이 사라지면, 유위이나 그 의도에 따라 인, 의, 예가 순서대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인은 유가를, 예는 법가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으며, 그렇다면 노자는 모든 사상을 다 알고 있었으며, 그런 사상을 다 포괄하여 이처럼 도가를 주장한 것인가. 어쨌든 예는 얄팍한 것이고, 혼란을 불러올 뿐이라며 경계하고, 근원인 도에 머물 것을 주의시킨다. 37장까지는 "도"가 주를 이루었다면, 38장부터는 "덕"경이라 하여 덕이 나온다. 마치 도>덕>인>의>예 인 것처럼 쓰여 있어 도와 덕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고민하면서, 이번 장 읽기가 많이 지연되었다. 아직도 잘 모르겠으나, "도"는 더 추상적인 원리에 가깝고, 이의 한 형태가 무위로써 "덕"인 것 같다.

+(추가) "처음 만나는 도덕경" 책을 빌려 38장만 발췌독 하였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하는 좋은 행동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고집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순간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의 갈등과 충돌이 필연적으로 야기된다. 그래서 결국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나쁜 것으로 변질되고 만다. 그러니 그것이 무엇이건 절대 고집하고 강요하지 마라.

 

39장.

지극히 영예로운 것은 영예로움이 아닙니다. 구슬처럼 영롱한 소리를 내려하지 말고, 돌처럼 담담한 소리를 내십시오.

 

모든 자연의 만물이, 자연 그대로일 수 있게 하는 무엇, 그 원리 '하나'. 지금 존재하는 모습은 다르나 지금 존재 일 수 있게 하는 근원에는 단 하나의 근원이 있다. 모든 높은 것, 귀한 것도 다 근원에서 시작하였으니, 근원을 잊으면 안된다. 지금 모습도 근원의 무한한 가능성 중 하나가 발현된 모습으로, 우리는 근원의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모습을 경외하고, 오히려 한 가지 능력이 발현된 지금은 오만을 경계해야 한다.

 

40장.

온 세상 모든 것 "있음"에서 생겨나고, 있음은 "없음"에서 생겨났습니다.

 

순환의 원리를 말하고 있으며, 그 우주적 원리인 "순환"이 어떤 강한 작위나 인위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의식조차 할 수 없을만큼 작은 변화가 쉼없이 이루어짐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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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장.

도는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써도 다함이 없습니다.

 

도를 지키면 모든 게 순리대로 이루어지고, 해로움이 없이 오직 평화롭다. 그러나 도는 음악이나 별미와 달리 좋다고 느껴지지 않아 굳게 잡기가 어렵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이분법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던 부분까지 보게 된다면 써도 다함이 없는 무궁무진한 도의 참 뜻을 알게 된다.

 

36장.

오므리려면 일단 펴야 합니다. 약하게 하려면 일단 강하게 해야 합니다.

패하게 하려면 일단 흥하게 해야 합니다. 빼앗으려면 일단 줘야 합니다.

이것을 일러 '미묘한 밝음'이라 합니다.

 

계속하여 노자가 말하고 있듯이 오므림과 핌, 약과 강, 폐와 흥  등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고, 변화의 과정에서 하나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순환의 원리를 아는 것이 미묘한 밝음이며, 우리는 이때 초연해지고 의연해질 수 있다. 인위나 작위없이 이러한 원리에 따르는 것이 부드러운 것이다. 마지막 구절 "나라의 날카로운 무기도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됩니다"에서는 韜光養晦가 떠올랐다.

 

37장.

도는 언제든지 억지로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 된 것이 없습니다.

 

도는 순리에 따르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일이 없으나, 순리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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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장.

이름이 생기면 멈출 줄 알아야 합니다. 멈출 줄을 알면 위태롭지는 않습니다.

이를테면, 세상이 도로 돌아감은 마치 개천과 계곡의 물이 강이나 바다로 흘러듦과 같습니다.

 

계속하여 "무위"의 치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으며, 인위, 작위 없이 순리에 따라 다스린다면 마치 개천과 계곡의 물이 강이나 바다로 흘러들어가듯이 자연스럽게 저절로 순복하게 될 거라고 말하고 있다. 28장에서 "다듬지 않는 통나무"를 마름질하면 그릇이 되고, 성인은 이를 사용하여 지도자가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30장과 31장에서 목적을 이룬 군주는 더 나아가지 않고, 군림하려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순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다듬지 않은 통나무를 다듬어 목적을 달성하였다면 이제 더이상의 작위를 멈추고, 물이 바다로 흘러가듯, 다시 "도"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33장.

남은 아는 것이 지혜라면, 자기를 아는 것은 밝음입니다.

남을 이김이 힘있음이라면, 자기를 이김은 정말로 강함입니다.

 

남을 아는 것보다 자기를 아는 것이 진짜 지혜이고, 남을 이기는 것보다 자기자신을 이기는 것이 정말로 강함이다. 만족할 줄 알면 그 것이 진정한 부유함인데, 거기서 더 강행한다면 인위적인 것이다. 지금의 자리를 잃지 않으려고, 머무르려고 하는 것은 그저 오랠 뿐이고, 진정한 "수"를 누린다 함은 인위적으로 멸망하지 않고, 순리에 따라 죽는 것이다.

 

34장.

언제나 욕심이 없으니 이름하여 '작음'이라 하겠습니다.

온갖 것 다 모여드나 주인 노릇 하려 하지 않으니 이름하여 '큼'이라 하겠습니다.

 

"도"는 어디에나 존재하며, 분별이 없고, 어떠한 규칙이나 기준에 얽매이지 않는다. 다만 천성이 그러할 뿐. 따라서 온갖 것 다 품을 수 있고,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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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장.

도로써 군주를 보좌하는 사람은 무력을 써서 세상에 군림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도"의 길은 작위와 인위를 피하는 것인데, 가장 큰 작위는 무력과 전쟁임을 환기하며, 경계하고 있다. '무위'는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다. 작위적인 것을 안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자연스러운 행동은 하는 것이다. 쳐들어오면 방어하는 행동 등. 자연스러운 행동까지 무위이고, 그 이후에 그 승리를 발판으로 군림하거나 더 나아가는 순간 작위가 된다. 또한 '物極必反, 무엇이나 기운이 지나치면 쇠하게 마련,'이므로, 일시적인 목적 달성으로 교만해지거나 뽐내지 않을 것을 당부한다.

 

31장.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물건, 군자가 쓸것이 못 됩니다. 할 수 없이 써야 할 경우 조용함과 담담함을 으뜸으로 여기고 승리하더라도 이를 미화하지 않습니다.

 

30장에 이어 계속하여, 무력을 통한 인위적인 목표달성을 경계하고 있다. 인위적인, 무기, 무력을 이용한 목표달성은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반작용을 수반하므로 일시적일 뿐이다. 우주의 큰 흐름에 따라 순리대로 무위로 이룬 것만이 영원할 수 있다. 철로 된 무기만이겠는가. 수확량 증가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농약사용 등의 인위적인 방법들은 오히려 내성이 생긴 강한 해충을 만들어버렸고, 벌목 등 무분별한 개발은 생태계 파괴 및 많은 동식물들을 멸종시켜, 이제는 인류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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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장.

흰 것을 알면서 검은 것을 유지하십시오.

 

남성과 여성, 흰 것과 검은 것, 영광과 오욕, 반대되는 양립할 수 없는 개념같지만, 노자는 계속해서 양립가능하며, 이분법적 사고를 탈피할 것을 말한다. 그러면 갓난아기, 무극, 다듬지 않는 통나무로 표현되는 "도"에 가까워지는데, 진정한 "도"는 작위, 인위를 내려놓는 것이다.

 

29장.

세상은 신령한 기물, 거기다가 함부로 뭘 하겟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인상적인 장이다. 28장까지 읽으면서 너무 감명깊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모든 인위적인 요소를 다 내려놓는다면, 좋은 대학을 가려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회사에 가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승진하고 가족을 부양하려 더 열심히 일하고 이런 것들이 다 부질없다는 건가? 모두들 다 그리 살고 있는 이 상황에서 나만 고고한 한 마리 황새처럼 다 내려놓으란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노자가 계시다면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이 장에서 조금 이해가 되는 듯 하다. 그러한 노력도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사심없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物極必反... 모든 것에 다 순리가 있으니. 차분한 마음, 의연함과 초연함으로 허공에 가득한 도의 큰 흐름과 리듬을 알고 거기에 순응하겠다는 겸손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도덕경을 읽기 시작한 후, 좀 착해진 것 같다 ㅋㅋ 일상생활에서 화가 나는 상황이 줄어들었음을 느낀다.(물론 내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느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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