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부처와 중생, 번뇌와 보리, 주관과 객관, 본질과 현상을 둘로 나누어 모양을 지으면 그것은 상이 되어 버립니다. 일체가 한 몸이고 하나임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일체동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늘 사랑받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하고 도움받고 싶어합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얻고자 합니다. 삶의 괴로움은 이렇게 남에게 의지하고 기대하는 마음, 얻으려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해지고 싶은 이는 얻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고 이해하고 베풀며 남을 위하는 마음을 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입니다.
그러나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을 세워 실천하더라도 내가 지금 중생을 제도한다는 마음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나와 중생을 구별하고 내가 중생을 제도한다는 생각은 내 마음이 일으키는 분별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내 분별이 사라지면 세상은 있는 그대로 청정하고 모든 사람이 지금 그대로 완전한 부처임을 볼 수 있습니다. 장엄할 국토도 없고 제도할 중생도 없는 이치가 이와 같습니다.
계속하여 상을 짓는 것, 구분하는 것, 분별심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
본래부터 복이라는 게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이라고 부를 뿐 정해진 복의 성질이란 없습니다. 재앙의 성질 역시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복이라고 하는 그것이 사실은 재앙일 수도 있고, 세상 사람들이 재앙이라고 말하는 그 일이 사실은 복일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복과 재앙을 거꾸로 잘못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재앙의 성질도 복의 성질도 아무 정해진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제법이 공한 이치가 그것입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임하느냐에 따라 온갖 것이 다 복이 되기도 하고 온갖 것이 다 재앙이 되기도 합니다. 중생심으로 보는 이에게는 재앙이 되고, 불보살의 마음으로 대하는 이에게는 복이 됩니다. 복이라고 할 성질이 없으므로 인연따라 세상 모든 일이 다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본래 복덕이라고 할 것이 없으므로 오히려 복덕이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복은 기다리는 것이 아닌, 받을 자가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모든 일이 다 복이 될 수 있으므로.
얻으려고 하면 아무리 많은 것을 받아도 부족하고, 주려는 마음을 내면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실제로 베풀 수 있는 조건이 이루어집니다. 얻는 것이 소원인 사람의 원이 성취되려면 남에게 도움을 얻을 만한 상황에 처해야만 합니다. 자꾸 얻으려고만 하면 자꾸 그만큼 불쌍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고, 자꾸 베풀려는 마음을 내면 베풀 수 있는 조건이 자꾸 다가옵니다. 얻으려는 소원이 성취된다는 것은 불쌍하고 도움 얻을 만한 처지가 된다는 것이니, 이런 중생심의 기도는 성취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복덕의 성품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은 이치를 알아야 합니다. 아무런 성품이 없으므로 인연에 따라 복의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재앙의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마음의 미혹이 사라지면 내 밖의 세계는 다 공한 법입니다. 그것이 내 것이라는 망념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움직여 흐르고 있을 뿐인 실상의 참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 실상을 아는 사람에게는 결코 내 것을 남에게 주었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받을 복이 있다는 생각도 일어날 여지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하나의 우리를 흐르고 있는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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