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19.

부처와 중생, 번뇌와 보리, 주관과 객관, 본질과 현상을 둘로 나누어 모양을 지으면 그것은 상이 되어 버립니다. 일체가 한 몸이고 하나임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일체동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늘 사랑받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하고 도움받고 싶어합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얻고자 합니다. 삶의 괴로움은 이렇게 남에게 의지하고 기대하는 마음, 얻으려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해지고 싶은 이는 얻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고 이해하고 베풀며 남을 위하는 마음을 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입니다.

그러나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을 세워 실천하더라도 내가 지금 중생을 제도한다는 마음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나와 중생을 구별하고 내가 중생을 제도한다는 생각은 내 마음이 일으키는 분별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내 분별이 사라지면 세상은 있는 그대로 청정하고 모든 사람이 지금 그대로 완전한 부처임을 볼 수 있습니다. 장엄할 국토도 없고 제도할 중생도 없는 이치가 이와 같습니다.

 

계속하여 상을 짓는 것, 구분하는 것, 분별심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

 

본래부터 복이라는 게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이라고 부를 뿐 정해진 복의 성질이란 없습니다. 재앙의 성질 역시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복이라고 하는 그것이 사실은 재앙일 수도 있고, 세상 사람들이 재앙이라고 말하는 그 일이 사실은 복일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복과 재앙을 거꾸로 잘못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재앙의 성질도 복의 성질도 아무 정해진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제법이 공한 이치가 그것입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임하느냐에 따라 온갖 것이 다 복이 되기도 하고 온갖 것이 다 재앙이 되기도 합니다. 중생심으로 보는 이에게는 재앙이 되고, 불보살의 마음으로 대하는 이에게는 복이 됩니다. 복이라고 할 성질이 없으므로 인연따라 세상 모든 일이 다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본래 복덕이라고 할 것이 없으므로 오히려 복덕이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복은 기다리는 것이 아닌, 받을 자가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모든 일이 다 복이 될 수 있으므로.

 

얻으려고 하면 아무리 많은 것을 받아도 부족하고, 주려는 마음을 내면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실제로 베풀 수 있는 조건이 이루어집니다. 얻는 것이 소원인 사람의 원이 성취되려면 남에게 도움을 얻을 만한 상황에 처해야만 합니다. 자꾸 얻으려고만 하면 자꾸 그만큼 불쌍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고, 자꾸 베풀려는 마음을 내면 베풀 수 있는 조건이 자꾸 다가옵니다. 얻으려는 소원이 성취된다는 것은 불쌍하고 도움 얻을 만한 처지가 된다는 것이니, 이런 중생심의 기도는 성취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복덕의 성품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은 이치를 알아야 합니다. 아무런 성품이 없으므로 인연에 따라 복의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재앙의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마음의 미혹이 사라지면 내 밖의 세계는 다 공한 법입니다. 그것이 내 것이라는 망념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움직여 흐르고 있을 뿐인 실상의 참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 실상을 아는 사람에게는 결코 내 것을 남에게 주었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받을 복이 있다는 생각도 일어날 여지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하나의 우리를 흐르고 있는 것일 뿐.

 

반응형

18.

괴로움과 번뇌는 내 욕구대로 세상이 움직이길 바라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되고, 내 생각에 갇혀 분별을 일삼는 데서 일어납니다. 옳으니 그르니, 잘했으니 잘못했느니 하는 시비 분별을 떠나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는 안목이 지혜의 눈입니다. 혜안이 열려 세상의 참모습을 보는 보아야 마음의 갈등이 사라지고, 가족과의 갈등이 사라지고, 이웃과의 갈등이 사라지고, 모든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불안佛眼이란 일체가 여여함을 깨친 안목입니다. 불안이 열린 붓다는 주객을 완전히 떠난 경지이므로 보이고 보이지 않는 것, 깨닫고 깨닫지 못한 것, 법과 법 아닌 것 등등 모든 구별과 대립이 없습니다. 주객이 완전히 끊어져 오고 감이 없고 주고받음이 없으니 그야말로 일체가 다 같음을 보는 경지입니다.

과거는 내 생각 속에 있을 뿐이며 지금 이 순간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과거의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한 과거는 나를 손톱만큼도 괴롭힐 수 없습니다. 내가 그때의 괴로움을 돌이켜 기억해 내서 다시금 괴로운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실현되지 않은 시간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직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도 없는 미래를 가지고 근심 걱정을 하기도 하고 기대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현재입니다. 지나간 과거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도 지금 이 순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눈팔 틈 없이 집중해야 하는 시간은 미래도 과거도 아닌 바로 현재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현재를 놓치며 삽니다. 과거를 생각하다 현재를 놓치고 미래를 걱정하느라 또 현재를 놓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는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현재란 없습니다. 그런 삶은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지금 이 시간에 집중해서 최선을 다하면 현재가 쌓여 미래가 되어가는 이치를 꿰뚫어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의 마음에는 본질적 실체가 있을까요? 지금 일어나는 괴로움과 직면해서 그 본질을 찾아나가다 보면 거기에도 또한 아무런 실체가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현재의 마음도 하나의 허망한 움직임일 뿐입니다.

마음은 매순간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이것이 마음이다'하고 내놓을 만한 실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사실 내 속에서 순간순간 일어나는 분별을 일컫는 다른 이름입니다.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두렵다, 슬프다, 외롭다하는 갖가지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든 번뇌일 뿐입니다. 일체유심조. 이 모든 게 다 내 마음이 지어내는 일입니다.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정작 중요한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 현재조차도 사실은 순간순간 일어나는 마음의 분별일 뿐. 모든 것이 구별과 대립없이 하나임을 알면 분별없이, 거침없이 무한히 자유로울 수 있다.

 

반응형

16.

제법이 공한 이치를 알아서 복이 복 아니고 재앙이 재앙 아닌 이치를 깨친다면, 남이 나를 미워하고 욕해도 오히려 고마운 마음을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장애를 오히려 부처님의 가피로 볼 수 있는 눈을 뜨면, 거기에 해탈의 길이 열립니다.

인연법을 아는 사람은 '지은 인연의 과보는 피할 수 없다. 내가 지은 것은 내가 받는다'는 마음으로 기꺼이 자기 과보를 받습니다. 금강경의 이 구절은 내가 지은 인연과보를 몰라 하루하루를 억울하고 분한 마음으로 탄식하며 살아가느 이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내가 지은 인연의 과보가, 세세생생 쌓인 업장이 소멸되어 가는 중입니다.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꾸준히 지켜보고 참아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자칫 잘못해서 부정적인 마음에 휘둘리면 '나는 도저히 안돼'하는 생각에 좌절하기 십상입니다. 다 되어가는 공부를 놓치지 않으려면 꾸준하게 지켜보는 여유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윤회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이어져 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17.

누가 어떤 사건이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닙니다. 내 고집과 내 생각에 빠진 어리석음이 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괴로움이란 본래 없습니다. 이렇게 괴로움이란 것이 본래 없다는 것을 아는 이가 부처고, 본래 없는 괴로움에 사로잡혀 허우적거리는 이가 중생입니다.

 

그 돈이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닌 줄 알면 돈을 주고도 주었다는 마음이 일어날 여지가 없습니다. 그 돈이 내것이라는 생각때문에 내가 그에게 돈을 주었다는 마음이 남는 것입니다. 남을 도와준 뒤에 도와줬다는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그것이 '내 것'이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 만물은 본래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다만 지금 거기에 존재할 뿐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실상을 깨치면 남을 도와주고도 도와줬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베푼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모든 게 내 빚이다, 전생에 신세 진 일을 깜빡 잊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무거운 기대감에 발목 잡히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근본은 내 것이란 없다, 내것이니 네것이니 하는 구분은 다 내 생각이 지어놓은 상이라는 데 있습니다. 내 것이다-네 것이다, 깨끗하다-더럽다, 높다-낮다, 생긴다-사라진다, 만법이 다 생각따라 마음따라 일어납니다. 이 이치를 깨닫고 집착을 버릴 수 있다면 마음은 금세 편안해집니다. 그 실상을 깨친 자리에는 일체 번뇌가 자리할 수 없습니다.

 

도덕경에 따르면 만물이 물처럼 흐르다 나를 흘러 지나가는 과정이었던 것 처럼.

 

봄비가 내리면 땅속에 묻혀 있던 씨앗들이 너도나도 싹을 틔웁니다. 수십 수백가지의 새싹이 젖은 흙을 밀치고 올라옵니다. 같은 땅, 같은 햇빛, 같은 수분, 같은 조건에 처해 있는데도 수없이 다른 종류의 싹이 올라오는 이유는 씨앗이 달라서입니다. 그처럼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도 사람마다 제각각 생각이 다른 것은 저마다 마음의 씨앗인 업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좋다는 마음도 자기 씨앗으로부터 일어나고, 싫다는마음도 자기 씨앗으로부터 일어납니다. 부처님이 방긋 웃으신 이유도 바라문의 그러한 마음자리가 훤히 보였기 때문입니다.

 

어제 아파트 지상 주차장에 들어설 때, 경비아저씨가 다짜고짜 거기에 차를 세우지말라고 소리쳤다. 뜬금없는 고함에 당황하여 나도 고성을 내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지상에 자리가 없어 들어가봤자 한바퀴 돌고 나올텐데, 그것을 알려주고 싶어 그랬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다 다르고, 공부하고 있어도 이렇게 상대방을 이해하기가 어렵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부처님은 그런 순간에도 상대방이 그러한 반응을 하게 된 모든 과정을 한 눈에 꿰뚫으시고 오히려 웃음으로 대하신다.

 

내가 옳다는 데 사로잡히면 화가 나지만, 내가 옳다는 생각이 없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 순간적으로 내가 옳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화를 내더라도 그것이 내가 옳다는 내 생각에 사로잡혀서 일어난 줄을 알아차리면 화는 금세 사라져버립니다.

지금의 행동은 오래전부터 형성되어 온 일정한 조건과 주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 이전부터 쌓아온 업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지금 일어난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내 주관과 시비를 내려놓고, 이미 일어난 일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피고 인정할 때 진실의 문이 열립니다. 그 사실이 내 도덕적 기준에 합당한지 아닌지는 그 다음 일입니다. 인정하는 것이 먼저고 합당함을 살피는 것은 그 뒤의 일입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머리로 가늠할 수 있어야만 그 존재를 인정합니다. 차별 현상계인 사법계에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감각으로 인지하는 세계를 색이라고 합니다. 색은 인연따라 모습을 달리 합니다. 색을 규정하는 고정불변의 성품이란 존재하지 않으니, 본질의 세계에서 보면 색은 텅 비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색즉시공입니다. 또한 고정불변의 본질은 존재하지 않지만 색은 인연따라 나타나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공즉시색입니다.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인데 있다는 생각에 매달리면 유에 빠지게 되고, 없다는 생각에 매달리면 무에 빠지게 됩니다.

 

도덕경에서 노자가 말씀하신, 인간 감각에는 한계가 있어 '도'를 정확히 알 수 없으며, 감각으로 알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말씀과 조금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인연을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인연에 어긋나면 문제가 생깁니다. 물은 언제 어느때라도 담기는 그릇에 따라서 그 모양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세상살이도 그처럼 조건과 시간과 공간에 맞게 인연을 따를 때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도덕경에서 노자가 말씀하신 '순리에 따를 때, 거침없게 된다.'는 말씀이 생각났다.

 

 

 

 

 

 

 

 

 

반응형

15.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내가 노력보다 수입이 많으려면 누군가는 노력보다 수입이 적어야 합니다. 내가 능력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려면 누군가는 능력보다 낮은 지위에 있어야 합니다. ... 그렇게 보면 우리가 바라는 복이란 결국 누군가의 손실을 바탕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복을 얻음으로써 남이 손실을 받았다면 그 손실은 언젠가는 나에게 되돌아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재앙이지요.

 

띠용.... 머리를 세게 얻어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 모든 것이 하나에서 출발하였다는 것, 도덕경에서 노자가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이며, 부처님 또한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다. 살면서 이상하게 뭐든 잘풀리는 운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봤었고 항상 부러워했었다. 나는 보통 내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남이 보기에도 정말 힘들고 많은 노력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는 순간... 그러한 내 삶에 감사하게 되었다. 나로 인해 누군가에게 손실이 없이 노력만큼 받을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오히려 노력보다 과분한 것을 받은 것은 아닌지 겸손하게 다시 한번 되돌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보살은 나와 내 가족을 떠나 온 인류를 생각하고 온 생명을 위하는 무주상의 보살행을 실천합니다. 남을 이롭게 하고, 남을 살리고, 남을 즐겁게 하고, 남을 편안하게 하는 사람이 바로 보살입니다. 세상의 복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복을 짓는 사람이 보살입니다.

 

출장 중 선배 한 분은 우리가 진행중이었던 프로젝트를 겪게 될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항상 생각하였다. 나는 나도 예전에 그 입장을 겪었었고, 그리고 연차가 쌓여 이렇게 프로젝트 계획에까지 오게 된 것을 당연한 과정으로 생각하여, 진행과정에서 조금씩 부딪히는 부분이 있었다. 참여하게 될 그들에게 정말 도움이 될지를 먼저 고민했었으면 더 좋았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람들은 불행을 행복으로 삼고 보살심의 씨앗으로 삼는다는 게 현실과는 동떨어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우리 삶 속에서 얼마든지 실현 가능하고 또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보살은 넘어진 김에 그 돌부리를 캐내어 다른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치워버립니다.

이렇게 깨달음과 뉘우침과 보살행은 가장 나쁜 일을 가장 좋은 일로 만들어버립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복덕도 재앙도 없는 이치가 그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게 부처님의 가피인 줄 압니다. 하지만 나쁜 일이라는 것이 오히려 부처님의 가피인 줄 아는 이 경지에 이르면 일체가 다 걸림없는 자유로운 삶이 열립니다.

 

내가 힘들게 얻은 만큼 남들도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실 모든 것이 하나인 것을 알면 일체가 다 거침없이 자유로울 수 있다.

 

 

반응형

9/10~9/15 출장

 

14.

우리는 순간순간 상에 사로잡혀 삽니다. 지금 내가 상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야 희망이 있지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꿈속을 헤메게 됩니다. 상에 사로잡힌 사람은 머리에 큰 바가지를 뒤집어쓴 채로 사는 사람입니다. 바가지가 눈을 가린 탓에 앞이 보이지 않으니 늘 이 사람 저 사람과 부디질 수밖에 없습니다. ... 그러나 내 바가지를 벗으면 나는 더 이상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살다보면, 특히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이것저것 아주 작은 것까지 다 신경쓰고 조심해야된다는 사실에, '이렇게까지 소심하게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나는 주로 눈치봐야하는 상황에서 부자유를 느끼는 것 같다. 그럴 때면 얼마나 "큰사람"이 되어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장자가 말하는 "대붕"의 날개짓을 느껴보고 싶다. 도덕경에서 노자는 순리에 따를 때 모든 것에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하였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상에서 벗어나면 상으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들을 피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상을 잃게 되면 상대의 어떠한 언행에도 나는 분별을 내지 않고, 흘려보내고,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화가나면 참지 못하고 그대로 화를 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상대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고통이 되어 되돌아옵니다. 그러니 화를 참는 것이 너와 나 모두를 위해 현명한 일이고 그것이 수행의 첫 단계입니다. 하지만 화가 나는데도 무조건 참기만 하면 화가 쌓여 도리어 병이 됩니다. 치솟는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면 언젠가는 폭발하거나 아니면 울화병이 납니다. 수행자는 문제를 피하거나 묻어두지 않고 끝까지 풀어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참는 것만으로는 완전히 행복해질 수 없고 그것은 수행의 목적이 아닙니다. 여기서 수행의 두번째 단계가 시작됩니다. 화가 날 때 화를 내거나 마음속에 그대로 쌓아두는 게 아니라 대자대비 부처님께 하소연해서 푸는 방법입니다. 기도를 하는 절실함은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지고한 평화와 행복에 이르려면 화 자체가 생겨나지 않아야 합니다. 화가 나는 마음의 근본은 살펴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나다!'하는 아상이 버티고 있습니다. 무슨 일로든 화가 잔뜩 났을 때의 자신을 돌이켜보면 그때의 내 마음은 '내가 옳다' 상대가 잘못했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여의면 더이상 아무것도 참을 것이 없습니다.

 

중생은 매사를 자기 식으로 자기 입장에서 바라봅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 각자가 자기 관점을 고집하다 보니 갈등이 생기고 싸움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내 고집과 내 생각에 갇힌 채로 세상을 보고 있었음을 깨우쳐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은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하는 이해와 참회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내가 옳다는 상을 내려 놓으면 상대의 생각과 입장이 눈에 들어오고, 상대의 생각과 입장을 이해하면 그것이 바로 상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나에게는 내 입장이 있듯이 상대에게는 상대의 입장이 있다는 그 사실만이 유일한 객관입니다.

 

나에게는 내 입장이 있듯이 상대에게는 상대의 입장이 있다는 그 사실만이 유일한 객관입니다.

정말...고개가 절로 숙여지지 않을 수 없다. 거침없이 살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여기 있는데...이 간단한 진리를 삶에 적용시키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을.

 

 

 

반응형

13.

어떤 사람이 열심히 수행한 끝에 욕심도 짜증도 성냄도 일으키지 않는 경지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모습을 보고 키와 몸무게는 얼마고 눈과 귀와 코의 모양은 이러이러하다고 자세히 묘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특징을 가진 사람이 모두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부처에게 삼십이상의 특징이 존재하지만, 그런 특징들로써 부처를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부처의 몸이 가지는 특징은 상에 불과합니다. 모든 상으로부터 벗어나 제법이 공한 이치를 깨치지 않고는 부처를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머리로 상상하는 것들에 매달려서는 부처를 보고도 부처인 줄을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유명 사찰을 찾고, 기도가 영험하다는 곳을 찾고, 유명한 관세음보살상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기도한다. 물론 이것도 좋지만, 이것은 상에 집착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상에 집착해서는 다가갈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시다.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지금 깨달으려 하고, 깨달은 바를 통해 목적없이 다른 사람과 나누려하는 자세야 말로 부처님께서 말하고자 하는 바인 것 같다.

 

반응형

11.

대왕이여, 불도란 쉽고도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보시로도 얻을 수 있지만, 수천의 보시로도 얻지 못하기도 합니다. 불도를 얻기 위해서 가난한 자를 돕고 병든 자를 치료하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여 만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푸십시오. 많은 사람에게 보시하고 선행을 쌓으며 스스로 겸손해 남을 존경해야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자기가 쌓은 공덕을 내세우거나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을 닦으면 뒷날에 언젠가는 부처가 될 것입니다.

 

하나의 보시로도 얻을 수 있지만, 수천의 보시로도 얻지 못하기도 한다. 보시의 양보다 상에 기대지 않는 무주상보시의 공덕이 가장 큼을 말씀하고 있다.

 

12.

'집착 없이 마음을 내라고 했는데 내가 아직 완전히 깨닫지 못해서 그렇게 안되니까 나을 돕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겠다.' 이렇게 생각해서 그저 주저앉는 것 역시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수행의 목적은 남을 돕는 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흔들림 없는 참자유 참행복을 누리기 위해 수행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머무름이 없어야 한다는 참뜻을 바르게 알았다면, 완전한 자유와 행복에 이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나갈 뿐입니다.

 

보시를 함에 있어, 남을 돕는다는 생각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모든 것이 하나에서 나온 것임을 알면,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곧 나를 돕는 것이니, 누군가를 위해 돕는다는 생각이 없고, 그저 무심히 하게 되는 것이다.

반응형

10.

수기란 어떤 법을 받아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움켜쥐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음으로써 부처를 이룰 수 있다는 깨달음의 약속입니다.

 

하늘의 태양과 달과 별이 그 누구의 것도 아니듯이 공기와 물과 흙 또한 그 누구의 것도 아니며 집도 차도 사람도 그 누구의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쓰일 뿐이니 누가 쓴다 해도 인연에 따르는 것일 뿐입니다. 보살은 그런 마음으로 분별심없이 불국토를 장엄합니다.

 

상을 깨고 한 발 물러나서 바라보면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이 생기든지 미워하거나 원망할 일이 없습니다.

 

더러움과 대립하는 깨끗함, 악에 대립하는 선을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떠한 상도 짓지 않고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걸림없는 마음, 육근 경계에 머문 바 없는 마음을 청정한 마음이라고 이름 지어 부를 뿐입니다.

 

더러움과 깨끗함, 악과 선, 상반되어 보이는 것들이 같은 하나에서 나왔음을 알고, 눈으로 보이는 그대로의 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그에 대해 어떤 감정이나 마음을 머문 바 없이 대하라는 뜻인 것 같다.

 

크다는 실체도 작다는 실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크다고도 하고 작다고도 합니다. 다만 인연에 따라서 크다고 이름할 뿐이고 작다고 이름할 뿐입니다. 이렇듯 고정불변의 절대적 기준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구분은 인연을 따라서 나타났다 인연을 따라 사라지는 상대적 현상일 뿐입니다.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인 것이니, 욕심내거나 화내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는 것 같다.

 

금강경을 읽으면서 느끼는 바는 정말 깜짝 놀랄만큼 도덕경에서 말하는 바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반응형

9.

수다원

예류에 든 사람이라면 잠시 어리석음에 휘둘려도 이내 정신을 차리고 돌이켜서 바른 길로 되돌아옵니다. 화를 냈다가도 아집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아차리고, 욕심을 냈다가도 그것이 자기 욕심임을 알아차리고, 꿈을 꾸다가도 그것이 꿈인 줄 알아차립니다.

 

잘못된 줄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행동과 말들, 즉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죽음의 길인지 어떻게 하면 괴로움이 일어나는지를 바르게 보고 바르게 알아차려야 한다.

 

사다함

사람들은 대게 감정이 나타나기 전에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지나가는 느낌을 감지하지 못하는데, 그 느낌은 바로 쾌 또는 불쾌, 또는 쾌도 아니고 불쾌도 아닌 경우입니다. 이러한 쾌와 불쾌에 따라서 하고 싶다는 욕망이나 하기 싫다는 혐오가 일어납니다. 그 마음을 愛라고 합니다. 애가 일어 났을 때, 하고 싶다든가 하기 싫다는 욕망에 끌려가면 그 욕망을 따라 행동하게 되고, 그 행동에는 반드시 과보가 따릅니다. 이렇게 해서 어리석은 삶이 되풀이됩니다. 그런데 부지런히 수행 정진해서 쾌와 불쾌가 일어나는 그 순간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으면 업식이 경계에 반응은 하되 새로운 욕망을 일으키지는 않게 됩니다.

 

쾌와 불쾌가 일어나는 순간에 좋거나 싫다는 반응을 하지 말고, 그 감정을 바라보는 것이다.

 

돈을 못 벌었다고 우는 사람이나, 권력 못 잡았다고 우는 사람이나, 명예를 못 얻었다고 우는 사람이나, 도를 못 얻어서 우는 사람이나 상에 집착해서 생기는 괴로움 속에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상을 짓고 집착한다는 점에서는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든 상을 내려놓으면 동산이라는 말을 들어도 다툼이 없고 서산이라는 말을 들어도 다툼이 없습니다. 동산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가 서쪽에 사는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서산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가 동쪽에 사는 사람임을 알아차리니 다툴 일이 없습니다.

하나의 상을 지으면 저절로 두 개의 상이 됩니다. 깨끗하다는 상을 지으면 반드시 그 옆에 더럽다는 상이 생기고, 선하다는 상을 세우면 그 옆에 저절로 악하다는 상이 생깁니다. 그래서 두 개의 상이 생긴다는 것은 만 개의 상이 생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법의 실상은 만 가지 상이 다 일상으로부터 일어난 것인데 그 일상마저도 없다는 무상인 것입니다.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개념이 하나의 상에서 나온다는 사실, 또한 거기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개념들. 이 모든 것은 원래 하나였으며, 더 나아가 그 하나조차도 없다는 무상의 경지가 바로 '해탈'이다.

 

 

반응형

7.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기준을 가지고 열심히 산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스스로를 옭아매는 속박의 끈을 더 단단히 조여 맨 것에 불과할 때가 많습니다. 누에가 제 입에서 나온 실로 고치를 만들고 그 속에 갇히듯, 내가 일으킨 생각에 사로 잡혀 스스로를 구속합니다. 고정관념으로 만들어진 온갖 상을 깨뜨리면 나비가 고치를 뚫고 나와 창공을 훨훨 날듯 내 앞에 자유로운 세상이 활짝 펼쳐집니다. 그것이 바로 해탈입니다.

 

살며, 배우고, 익히는 것들이 오히려 나를 현재에 머물게 한다. 언제든 다 내려놓고 무에서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부처는 이 세상에 한 물건도 본래 내 것 네 것이 없다는 것을 중득한 사람입니다. 무소유, 무소아이므로 더 이상 주고 받는다는 생각이 없고 다만 필요에 따라 쓰일 뿐이지요.

 

모든 것이 하나에서 나와, 구별이 없는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 같다.

 

물이 그릇에 따라 모양을 바꾸듯 인연따라 그때그때 바뀌어야 문제가 없습니다. 인연 따라 사는 삶이 집착이 없는 삶이고, 그것이 바로 무위의 삶입니다.

 

내가 난데...라는 마음을 버리고 유연함을 가져야 한다.

 

8.

지금 내것이라고 믿는 것은 잠시 내 손에 머물러 있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누구의 것도 아니기에 누구에게 얼마만큼 내준다 해도 그것은 나의 공덕이 아닙니다. 본래 이 물건이 누구의 것이 아닌 줄을 알면 이것을 누구에게 보시한다고 해도 아무런 공덕을 지은 바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원래 다 하나에서 나왔음을 알면 무주상보시를 할 수 있게 된다.

 

옳고 그름 역시 그러습니다. 다만 인연에 따라 그때그때 상황속에서 잠시 형상을 갖추고 나타나는 것이지, 옳다 그르다 할 본래의 성품이 없습니다.

 

지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절대적인 진리는 없는 것이니, 알고 있는 지식에 집착하거나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