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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강을 건너고 나면 뗏목을 버리고 길을 가야 하듯, 부처님은 불법 역시 집착할 바가 못된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법조차 집착하지 않고 놓아버려야 하거늘 법 아닌 것, 내 생각이나 고집, 재물이나 명예, 권력 따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나를 통과하여 흘러가거나, 내가 모든 것을 통과하거나 흘러가는 것... 집착하거나 소유하려하지 말 것.

 

내가 주인이 되면 내가 세상을 움직일 수 있으나, 상에 집착하면 그 상이 나의 주인이 됩니다. 상에 집착하는 것은 나를 꽁꽁 묶어 스스로를 구속하는 일입니다. 상을 여의는 것, 그것이 내 인생의 자유를 활짝 열어주는 불법의 길입니다.

 

상에 집착해 있는 '나'로부터 벗어나는 것. 살면서 경험을 하고 공부를 하고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기 위해 문자로서, 글로서 정리를 하고 외우는데...정작 그러한 행위가 더 나를 속박하고 현재에 집착하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

 

아직 많이 읽지 않았지만, 중고등학교 때 국사시간에 배웠던 기복신앙으로서의 불교가 아닌, 정말 심오한 철학임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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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내 것이라는 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보시는 '내가 그에게 내 것을 주었다'는 마음으로 남습니다. 거기에서 보상 심리가 싹트고, 그 싹이 자라 원망과 배신감의 열매를 맺습니다. 하지만 실상으로 본다면 본래 내 것이 없으므로 우리는 아무런 기대 없이 무주상보시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상에 집착하지 않고 행한 보시, 보시했다는 생각 없이 행한 보시의 복덕은 한량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상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상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비로소 세상의 참모습을 보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내가 지금 지향하는 목표, 지금 내 삶의 기준, 지금 내 눈에 그럴 듯해 보이는 형상이 마치 불변의 최고 가치인 양 매달려 살아가는 게 사람들의 삶입니다. 이렇게 상에 집착하면 괴로움의 씨앗이 뿌려져 그 누구도 과보를 피하지 못합니다. 상이 허망함을 깨치고 모든 형상의 집착을 뛰어넘어야만 부처의 도리를 알고 자유와 행복의 참맛을 볼 수 있습니다.

 

그대가 사라져 버릴 내 몸을 보았다 한들 대체 그것이 뭐란 말입니까. 박칼리여, 사물의 참다움을 보는 자는 나를 볼 것이요, 나를 보는 자는 사물의 참다움을 보는 것입니다.

 

좋고 나쁨을 구분하는 기준, 문제라고 판단하는 기준은 다 내 생각일 뿐입니다. 그 사실을 깨달으면 괴로움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본래 나쁜 것도 없고 본래 좋은 것도 없는 줄을 알면, 좋고 나쁘다는 상으로 생긴 온갖 시비와 갈등이 사라집니다.

 

일체 모든 것에 대한 구분이 없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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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보시를 행하되 집착없이, 머문 바 없이 하라.

 

상대에게 기대를 많이 하면 할수록 상대가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내 마음이 춤출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 사이의 갈등은 이해관계와 그로 말미암은 기대감 때문에 생깁니다.

 

상대에게 베푸는 것으로 내 할 일은 모두 끝났다는 마음, 베풀었다는 생각마저 없이 행하는 보시는 내가 행복해지는 길이며 번뇌를 소멸하는 길입니다.

 

빚을 갚는 사람과 같은 자세가 바로 무주상보시의 마음입니다. 마치 빚갚는 마음으로 '원래 당신 것이니 도로 가져가시오'하는 마음으로 베풀 때, 양보했다는 상을 버리고 양보할 때, 비로소 상대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해집니다.

 

남의 도움을 받는 사람은 그만큼 종속된 삶을 살게 됩니다.

 

원래 당신 것이니, 도로 가져가시오.. 원래 다 하나이니,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것은 내가 도움이 필요한 것이고,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돕는 것은 나를 돕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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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생은 자기 뜻대로 일이 되지 않으면 괴로워합니다. 남편이 돈을 못 벌어서, 자식이 공부를 못해서, 부모가 이혼을 해서, 친구가 배신을 해서 등등 갖가지 이유를 대며 괴로워 합니다. 이는 세상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괴롭다는 뜻이지요. 내가 괴로운 이유가 하나같이 다 다른 사람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나보다 힘이 센 존재,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단번에 해결해 줄 수 있는 존재, 즉 신이라는 존재에 매달려 제 뜻을 이루게 해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머리가 쿵! 했다. "내가 괴로운 이유가 하나같이 다 다른사람 때문"...그렇네...왜 그래야 하는거지? 나는 나인데, 왜 나의 괴로움은 항상 내가 아닌 밖에서 오는 것일까.

 

나의 괴로움이 남편이 술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자기 생각'에 집착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게 문제 해결의 핵심입니다. 남편이 술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그 마음만 놓아버리면 남편이 술을 더 먹는다고 해서 실망할 것도 없고 덜 먹는다고 해서 좋아할 것도 없습니다.

 

'술이 보약'이라는 말은 남편을 나한테 맞춰 바꾸려 하지 말고 남편 입장에서 그를 대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이 술상을 차려주는 일로 표현되는 것이고, 그렇게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가 행복하고 기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한 공덕은 내 마음을 바꿈으로써 이미 다 받았습니다. '내가 남편을 구제했다'든가 '남편은 아직 구제되지 않았다'는 생각은 여전히 상대에게 내 삶을 얽어매 놓고 종속시키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생각은 언제든 또 다른 괴로움을 불러옵니다.

 

흔히 뱀을 보고 징그럽다 하고 돼지를 보고 더럽다고 하지만 실제로 뱀이나 돼지가 그런 성질을 가진 건 아닙니다. 내가 한 생각을 일으켜 그런 식으로 고정관념을 만들어놓고 마치 그 존재가 그런 것인 양 착각하는 것입니다.

 

나와 너를 경계짓는 마음만 사라진다면 세계는 있는 그대로 하나입니다. 본래 경계가 없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을 울리는 문구가 너무 많아 인용이 대부분이며, 내가 느끼는 바를 말로 표현하기에는 본 내용이 너무나 크고, 또 감히 그러할 수도 없다. 세계는 있는 그대로 하나이며, 본래 경계가 없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지금 같이 읽고 있는 도덕경에서 노자가 말씀하시는 바와 많이 유사한 것 같다. 다만, 노자는 그러한 도를 통해 통치하여, 세상을 순리대로 흘러하게 하라하며, 부처께서는 더 많은 중생을 구제하라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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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금강경에 그려진 부처님의 행색은 마치 거지에 불과합니다. 다 떨어진 옷을 입은 채 발우 한 개 들고 이 집 저 집 밥을 동냥하는 부처님, 제자들과 함께 얻어 온 밥을 나눠 먹는 부처님, 식사를 마치고는 손수 가사와 발우를 정리하는 부처님. 이렇게 부처님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 부분을 읽을 때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가 "고타마"를 처음 보았을 때 묘사한 구절이 생각났다. 공양을 얻기 위해 수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걸어가는 평범한 모습이었는데, 싯다르타는 그 모습안에서 그분이 "고타마"임을 한번에 알아챘다. 부처님께서 이러한 지극한 평범한 속에서 깨달은 자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평범 속에서 부처님께서 말하려 하는 것은 무엇일까.

순간순간 바뀌는 마음의 변화는 모두 눈, 귀, 코, 혀, 몸, 뜻의 육근이 경계에 따라 일어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코로 맡는 냄새, 입으로 느끼는 맛, 손으로 느끼는 감촉, 머리에 일으키는 생각에 따라 순간순간 좋고 싫음을 구분합니다.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해선 매순간 변하는 감각에 의지한 좋고싫음에 대한 구분을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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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부터 금강경 30일 완독을 목표로 매일 읽기를 시작한다.

 

책은 법륜 스님의 "금강경 강의


 

 

금강경은 흔히 다이아몬드, 금강석처럼 단단한 경전이라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인도어로는 "바즈라", "벼락"의 뜻이라고 한다. 청천벽력 처럼 내려쳐서 인간의 모든 집착과 무지를 번개처럼 단칼에 내려 자르는 지혜라고 한다.

법륜 스님의 머리말처럼,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나는 얼마나 달라져 있을 것인지...

 

머리말에 인상적인 구절이 있다.


금강경은 생각이 그 어느 쪽으로도 고정되지 않게 하면서, 언어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 없는 살아 있는 깨달음을 듣는 이 스스로 체득하도록 하기 위해 말 아닌 말, 말을 넘어서는 말로써 언어적 한계를 뛰어넘었습니다. 이는 존재의 실상인 공에 대한 언어적 가르침을 넘어서려는 선종의 정신과도 흐름을 같이 합니다.

 

1. 법회인유분
하지만 앞으로는 수행자는 부자든 가난한 자든 가리지 말고 처음 탁발을 시작한 집에서부터 차례로 일곱번째 집까지만 밥을 비십시오. 모름지기 수행자는 분별을 내서는 안됩니다.


가난한 집에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생각이나 복을 짓도록 해주겠다는 생각 모두 우리 마음이 짓는 분별이다. 분별하지 않을 것. 상대방을 배려한 분별심이 오히려 더 상대방에게 배려가 아닐 수 있으므로. 게다가 누구에게든 분별을 버림으로써, 이 세상의 가장 높은 자보다 높고, 가장 낮은 자보다 낮은 이가 되어 일체중생이 평등함을 실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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