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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는 육아에, 출근하면 업무에 시달리고, 집에서는 밀린 회사일을 걱정하고, 회사에서는 퇴근 후 육아를 걱정한다. 밤에도 자고깨고를 반복하고, 몸도 정신도 내가 맞긴 한 것인지, 그저 당장의 큰 소리들에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

여긴 어디고, 몇시고, 나는 왜 여기있고,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고, 그러기 위해선 지금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라는 고민에서 집어든 책이다.

서점에서 훑어보다가, 가볍게 읽다가 3~ 5장마다 시도해보면 좋을 명상 팁들이 나온다. 매 장마다 명상팁이 나오면 다 소화하지도 못할테고, 읽으면서 위안도 받고, 간간이 나오는 명상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구입.

현재 읽고 있는 사기 열전과 병행하여, 천천히 읽어볼 계획이다.

몇 장 읽지 않았지만, 정말 힐링되는 느낌이 있고, 육아와 과도한 업무에 저어~~~ 멀리 떠나갔던 영혼이 내 몸으로 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을 느낀다.

"우리는 우리가 사실상 늘 생각 중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마음속을 끝없이 흘러가는 생각의 개울들 때문에 우리는 거의 잠시도 내적인 평온을 유지하지 못한다. 게다가 뭔가를 하기 위해 내내 뛰어다니지 않고는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여지도 거의 없다. 우리의 행동들은 우리 스스로 인식해서라기보다는 떠밀리듯 어쩔 수 없이 행해지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폭포까지는 아니더라도 빠르게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 마음속을 흐르는 더없이 평범한 생각과 충동들에 떠밀려서 말이다. 우리는 급류에 휘말려 있으며, 그 급류는 우리 자신을 원치않는 곳이나 아니면 심지어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들로 끌고가 결국 우리의 삶 자체를 수몰시켜버린다."

"... 무엇이 나타나든 온전히 받아들이며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깊은 관심을 갖고 그대 자신을 지켜봄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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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먼저 마음을 하나로 모으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다음엔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귀는 고작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고작 사물을 인식할 뿐이지만 기(氣)는 텅 비어서 무엇이든 받아들이려 기다린다. 도(道)는 오로지 빈(虛) 곳에만 있는 것. 이렇게 비움이 곧 '마음의 재(心齋)'니라. ...

 

정치참여를 하고자 하는 안회는 공자에게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알려 달라 하고, 공자는 목욕재계할 때처럼 의식으로 "재齋"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 재齋는 단순한 재가 아닌, "마음의 굶김 心齋"라 가르쳐준다. 귀는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대상을 인지할 뿐이지만, 기氣는 텅 비어 모든 것을 수용하니 이렇게 텅 빈 기氣로 사물을 대하면 그 빈 곳에 도가 들어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도가 들어오도록 마음을 굶기는 것이 '심재'이다. 귀, 마음 등 우리의 감각을 초월하여 도道와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13. ... 심재(心齋)를 실천하여 제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 이것을 비움(虛)이라 하는 것입니까? ...

 

심재心齋를 하면 일상적 의식 속에 존재하던 '작은 나'가 사라지고, 새로운 '큰 나'가 탄생한다. '큰 나'는 명예나 실리에 초연하게 되어, 거리낌, 걸림이 없게 된다.

 

14. 걷지 않고 자취를 안 남기기는 쉽지만, 걸으면서 자취를 안 남기기는 어려운 일. 사람을 위해 일할 때는 속이기 쉬우나, 하늘을 위해 일할 때는 속이기 어려운 일. 날개로 난다는 말은 들었겠지만, 날개없이 난다는 말은 못 들었을 것이다. 앎이 있어 안다는 말은 들었겠지만, 앎이 없이 안다는 말은 못 들었을 것이다. ...

 

심재心齋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고요 속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특히 몸은 가만히 있으나, 마음이 쏘다니는 상태를 좌치(坐馳)라 하며 경계하고 있다.

 

15. 귀와 눈을 안으로 통하게 하고, 마음이나 앎을 밖으로 하라. 그러면 비상한 힘도 들어와 머물 것이니, 사람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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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 인간세(人間世)를 시작한다.

 

인간세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란 뜻이다. 4편이 흥미로운 점은 기존의 도교의 은둔주의나 도피주의가 아닌 적극적인 사회, 정치참여의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1. 안회가 공자에게 여행을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

"저는 선생님께서 '잘 다스리는 나라를 떠나 어지러운 나라로 가라, 의원 집 문앞에는 병자가 많은 법'이라 하신 말씀에 따라, 위나라의 병을 고칠 길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읭? 공자와 그가 가장 아꼈다는 제자 안회의 대화가 등장한다. 장자는 공자와 안회의 대화를 통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안회의 질문에 공자가 대답한다.

 

2. ... 자기 하나 확실히 갖추지 못하고서 어떻게 포악한 자의 행위에 간여할 수 있겠느냐?

 

3. ... 덕은 이름을 내려는 데서 녹아 없어지고, 못된 앎은 서로 겨룸에서 생긴다. ...

 

4. ... 억지로 인의니 법도니 하는 것을 포악한 사람 앞에서 늘어놓는 것은 남의 못됨을 이용하여 자기 잘남을 드러내려 하는 것. 이를 일러 '남을 해치는 것'이라 한다. 남을 해치면 자신도 반드시 해침을 받는 법. 남들이 너를 해칠까 걱정이구나.

 

5. ... 이것은 불로 불을 끄고, 물로 물을 막으려는 것. 이를 일러 '군더더기'라 하지. ...

 

6. ... 그 사람들의 훌륭한 인격이 오히려 임금에게 그들을 제거시키도록 하는 빌미를 준 셈이 되고 말았다. ... 명예와 실리의 추구는 성인도 물리칠 수 없는데 네가 어찌 물리치겠느냐. 그러나 너에게도 까닭이 있을 터이니 어디 한번 말해 보아라.

 

유가(儒家)에서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안회가 아직 수신의 경지를 이루지 못하였으니, 치국은 섣부르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안회에게 날카로운 지적을 날린다. 자기 자신을 깊이 들여다 보고, 위나라로 가려는 것이 진정 그 나라 백성을 위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안회 자신의 명예와 실리를 위한 것인지를 냉철하게 판단해보라는 것이다. 결국 정치를 하고자 하는 아직 풋내기인 제자에게 아무리 애민정신이니, 파탄에 빠진 국가를 위해서라느니 하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조금이라도 자기의 이기적 목적에서 나온 것이 아닌지를 냉철히 살펴 보고, 조금이라도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그 일은 본인에게나 주변 사람들, 나아가 백성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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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포정이라는 훌륭한 요리사가 문혜군을 위하여 소를 잡았습니다.

손을 갖다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을 디디고, 무릎을 굽히고. 그 소리는 설컹설컹. 칼 쓰는 대로 설뚝설뚝. 완벽한 음률. 무곡 「뽕나무 숲」에 맞춰 춤추는 것 같고, 악장 「다스리는 우두머리」에 맞춰 율동하는 것 같았습니다.

 

4.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삼년이 지나자 통째인 소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신神으로 대할 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기관은 쉬고, 신神이 원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하늘이 낸 결을 따라 큰 틈바귀에 칼을 밀어 넣고, 큰 구멍에 칼을 댑니다. 이렇게 정말 본래의 모습에 따를 뿐, 아직 인대나 건을 베어 본 일이 없습니다. 큰 뼈야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습니까?

 

5. 보통의 요리사는 달마다 칼을 바꿉니다.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19년 동안 이 칼로 소를 수천마리나 잡았습니다. 그러나 이 칼날을 이제 막 숫돌에 갈려 나온 것 같습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이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없는 칼날이 틈이 있는 뼈마디로 들어가니 텅 빈 것처럼 넓어, 칼이 마음대로 놀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포정이라는 요리사의 훌륭한 소 잡는 솜씨를 묘사한 부분이다. 소라는 큰 고기를 잡는데, 그의 묘사는 마치 힘 하나 들이지 않고, 그저 춤추는 것 같으며, 칼 역시 19년이 지나도 새 것과 다름없다. 그는 억지로 힘을 써서 단단한 뼈를 자르는 것이 아니고, 소의 자연상태를 받아들이고, 연한부위로만 칼을 움직이는 것이다. 억지와 무력이 없으니, 칼도 그저 물처럼 흘러가서, 19년이 지나도 새것과 같을 뿐.

 

포정은 이 경지에 이르기까지 세 단계를 거친다. 처음에는 눈에 소밖에 안보이던 단계, 다음에는 소가 소가 아닌 것으로 보이는 단계, 나중에는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신神으로 대하는 단계이다. 처음에는 소가 당장 처리해야할 소로만 보인다. 점차 실력이 늘면 소는 더 이상 소가 아니라 각 신체부위 등 마치 소 해부그림처러 보이게 된다. 그리고 자신과 소와 칼이 모두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내가 움직이는 것인지, 칼이 미끄러지는 것인지, 소가 움직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바로 비이분법적 상태, '함이 없는 함(無爲之爲)의 경지이다.

 

그리고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왕이 천하디 천한 백정으로부터 "도"에 대해 배우고 있는 상황이다.ㅎㅎ 이를 통해 장자는 "도"는 어디에나 있는 것이며, 그렇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분별지智"로는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려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번 장의 내용은 각종 스포츠의 프로 선수들의 이야기에서 많이 나오는 내용들이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몸이 반응했다던가, 또한 나는 읽는 도중 만화 슬램덩크의 정대만의 "이젠 내겐 링밖에 보이지 않아"라는 대사가 떠오르기도 하였다. "도"는 내가 어떤 것과 물아일체가 되는 경지에 다다르는 것으로, 이외로 가까이에 생활 곳곳에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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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양생주(養生主)를 시작한다.

 

양생(養生)의 주(主), '생명을 북돋는 일'이다. 오강남 선생님은 그것을,

 

자연의 순리에 따라 거기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다. 지식욕, 자존심, 자기중심주의 같은 일체의 인위적, 외형적인 것을 넘어서서 자연의 운행과 그 리듬에 따라 우리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할 때, 우리 속에 있는 생명력이 활성화하고 극대화해 모든 얽매임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 이른바 '기대지 않는 삶'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1.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습니다. 아는 것에는 끝이 없습니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알려고만 한다면 더더욱 위험할 뿐입니다.

 

정말 완벽한 논리이다. 읽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다. 나의 경솔함, 거만함을 깨달았다. 하루살이가 하루를 온전히 다 살아도 내일을 알 수 없듯...

오강남 선생님은 여기서의 "앎"이란, 이런저런 것을 끝없이 따지고, 이것과 저것을 구별지으려하는 "분별지"를 말한다고 말씀하신다. "분별지"는 자꾸 따지고, 다른 것과 구분지으려 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방해한다. 즉, 지식을 경계해야 하며 직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노자 "도덕경"'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가는 것,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가는 것'이라는 구절과 일맥상통한다.

 

2. 착하다는 일 하더라도 이름이 날 정도로는 하지 말고, 나쁘다는 일 하더라도 벌받을 정도로는 하지 마십시오.

오직 중도를 따라 그것을 기준으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몸을 보전할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

어버이를 공양할 수 있고, 주어진 나이를 다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너무 착하게도 살지 말고, 나쁜 일도 어느 정도는 해도 된다는 것인가? 아닐 것이다. 장자는 선악, 미추 등의 이분법적인 지식을 경계하라고 하였다. 그러면 선악 즉, 착한 일도 나쁜 일도 없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래야 한다고 칭송하는 '착한 일', 세상 사람들이 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계하는 '나쁜 일'만이 있는 것이고, 이런 것들은 "분별지"이기 때문에 그러한 행동을 해야하고, 하지 말아야 됨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더 나아가 세상의 기준, 세상 사람들의 잣대에 얽매여 그것을 기준으로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거나, 맞추지 말라는 것이다. 구속받지 않고, 거침없이 본인의 생각대로 움직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절대자유의 경지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본인의 생각이란 것이 잔꾀에서 나오는 고의, 계략같은 것이 전혀 없이 자발적이고 자연적인 행동에 따르는 것을 말하며, 이를 '자연의 순리를 따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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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어느 날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보니 다시 장주가 되어 있었다.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일러 '사물의 변화(物化)'라 한다.

 

아주 유명한 이야기이다.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했던 "매트릭스"라는 영화가 이 일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실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듯한 이야기이다. 장자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 또한 꿈에서 깨어나면서,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현실이 아님을 알게 된다.  

 

재미있으면서도 난해한 이야기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나비가 곧 나고, 내가 곧 나비라는 것인가? 이 둘은 어느 것이 꿈인줄 모르므로 구별이 불필요하다는 것인가? 이에 장자는 무슨 구별이 있기는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을 '사물의 변화(物化)'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이 '사물의 변화'가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즉, 장자가 보는 세계는 모든 사물이 서로 얽히고 설킨, 장주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주가 될 수 있는 상호합일, 상호침투, 상호연관, 상호의존, 상호변화하는 세계를 말하고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를 보자.

 

(중략)...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저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달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중략)...

 

장석주 시인은 대추 한 알을 그저 대추로 보지 않고, 대추를 있게 한 다른 요소들을 보고 있다. 태풍, 천둥, 벼락, 무서리, 땡볕, 초승달 .... 이러한 요소들이 대추 한 알에 들어 있다고 노래한다. 태풍, 천둥, 벼락, 무서리, 땡볕, 초승달 그리고 대추는 위에서 말한 상호합일, 상호침투, 상호연관, 상호의존, 상호변화의 관계라 할 수 있다. 태풍이 대추고, 대추가 천둥이면서도 서로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것이 '사물의 변화'이다.

 

그리고 장자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자유롭게 넘나드는 "절대자유"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집착을 버리고, 아집, 편견, 자기중심주의, 오만 등의 태도를 경계해야함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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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해와 달과 어깨동무, 우주를 끼어 차고, 모두와 하나된다.

모든 것은 혼잡한 대로 그냥 두고, 낮은 자리 높은 자리 무관하다.

사람들 빠릇빠릇, 성인은 어리숙.

만년 세월 온갖 일.

오로지 완벽의 순박함 그대로.

모든 것들이 모두 그러함 그대로.

그리하여 서로가 감싸안는다.

 

성인이란 뭔가 일반인의 상식을 완전히 초월하여 모든 것을 덮는 커다란 존재이면서도, 있는 그대로를 포용하는 어찌보면 어리숙해보인다는 뜻인 것 같다.

 

26. 진나라로 데려갈 때 여희는 너무 울어서 눈물에 옷깃이 흠뻑 젖었지. 그러나 왕의 처소에 이르러 왕과 아름다운 잠자리를 같이하고 맛있는 고기를 먹게 되자, 울던 일을 후회하였다네. 죽은 사람들도 전에 자기들이 삶에 집착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까?

 

우리는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 처하는 것을 두려워 한다.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에 안주하지 말고, 익숙하고 편한 예전의 "나"를 떠나 보내야 한다. 또한 이런 변화는 삶과 죽음처럼 그저 계절의 변화같은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이라 말하고 있다.

 

27. 우리가 꿈을 꿀 때는 그것이 꿈인 줄 모르지. 심지어 꿈속에서 해몽도 하니까. 깨어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게 되지. 드디어 크게 깨어나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한 바탕의 큰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항상 깨어있는 줄 알고, 주제넘게도 그러함을 분명히 아는 체하지. 임금은 뭐고 마소 치는 사람은 뭔가? 정말 꼭 막혀도 한참일세.

 

우리가 꿈을 꿀 때는 꿈인지 모른다. 그리고 깨어나서야 그것이 꿈인 줄 안다. 우리는 꿈 속에서 누구는 왕이고, 누구는 마부이고, 누구는 부자이고, 누구는 가난하고의 꿈을 꾼다. 그리고 그것이 꿈인 줄 모르고 그 안에서 아등바등 살고 있는 것이다.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크게 깨어나야(大覺)"한다. 

 

28. 한 쪽이 옳으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그른 것인가? 두쪽이 다 옳거나 두 쪽이 다 그른 경우는 없을까? 자네도 나도 알 수가 없으니 딴 사람들은 더욱 깜깜할 뿐이지.

 

30. 이처럼 변하기 쉬운 소리에 기대하는 것은 아예 기대하지 않는 것과 같네. 이런 것을 '하늘의 고름'으로 조화시키고 '무한의 변화'에 내맡기는 것이 천수를 다하는 길이지. '하늘의 고름'으로 조화시킨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사람들은 보통 '옳다, 옳지 않다', '그렇다, 그렇지 않다'고 하네. 그러나 옳다고 하는 것이 정말로 옳다면, 옳은 것이 옳지 않은 것과 다르다는 것은 변론할 여지가 없는 일이지. 그렇다고 하는 것이 정말로 그렇다면, 그런 것이 그렇지 않은 것과 다르다는 것 또한 논쟁할 여지가 없는 일 아닌가. 햇수가 더해 세월 가는 것을 잊고, (옳다 그르다) 의미를 따지는 일을 잊어버리게. 구경의 경지로 나아가 거기에 머물도록 하게.

 

한 가지 사물을 보는 데도, 보는 방향, 관점에 따라 다르게 말할 수 있다. 즉 관점에 따라 각각이 다 맞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알아 '하늘의 고름'으로 조화시키고, 그저가는 대로 순리에 맞게 변화에 내맡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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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있음'이 있으면 '없음'이 있게 마련이다. 또 '있음' 이전의 그 '없음'이 아직 있기 이전이 있어야 한다. 또 없음이 아직 있기 이전이 아직 있기 이전, 그것이 아직 있기 이전의 없음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데 갑자기 있음과 없음의 구별이 생긴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18. 모든 것이 원래 하나인데 달리 무엇을 더 말하겠느냐? ... 이처럼 계속 뻗어가면 아무리 셈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그 끝을 따라 잡을 수가 없을 것이니 보통 사람들이야 일러 무엇하겠나?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가도 이처럼 금방 셋이 되는데, 하물며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갈 때야 일러 무엇하겠나? 그러니 부산하게 좇아 다니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그러하다고 받아들이자.

 

무언가에 대해 언어로써 정의한 순간, 그것은 큰 도로부터 분리되어 "그것"과 "그것이 아닌 것"이 생기게 된다. 다시 이 개념들은 무수히 확장하게 된다. 이렇게 구분하고 따지고 시비를 가리면서 "부산하게 쫓아다니지 말고", 그것을 넘어서 직관적으로 "있는 그대로를 그러하다"고 받아들이자. 사실 원래 다 하나였으므로.

 

19. 사실 도에는 경계가 없고 말에는 실재가 없다. 말 때문에 분별이 생겨나는데 이 분별에 대해 말해 보기로 하자.

 

20. 무릇 위대한 도는 이름이 없다. 위대한 변론은 말이 없다. 위대한 인은 편애하지 않으며, 위대한 겸손은 밖으로 드러내는 겸양이 아니다. 위대한 용기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 이 다섯가지는 본래 둥근 것이지만 잘못하면 모가 난다. 그러므로 알지 못함을 알고 멈출 줄 아는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다.

 

결국 말은 분별을 일으킬 뿐, 무언가를 정의하는 데에 완전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결국 도에 대해서 말하려면 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는 것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22. ... 도대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23. 모장이나 여희는 남자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지만, 물고기는 보자마자 물 속 깊이 들어가 숨고, 새는 보자마자 높이 날아가 버리고, 사슴은 보자마자 급히 도망가 버린다. 이 넷 중에서 어느 쪽이 아름다움을 바르게 안다고 하겠는가?

내가 보기에, 인의의 시작이나 시비의 길 따위의 것은 겨룩 이처럼 주관적 판단 기준에 따라 걷잡을 수 없이 번잡하고 혼란한데 내 어찌 이런 것이나 따지고 앉아 있겠는가?

 

우리가 만든 개념들이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상대적인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의와 시비 또한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환경과 상황에서 형성된 임의적, 주관적 규범이지 절대적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24. 지인至人은 이로움이니 해로움이니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습니까? ... 그에게는 삶과 죽음마저 상관이 없는데, 하물며 이로움이니 해로움이니 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지인은 절대의 세계와 하나가 되어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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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이와 같은 이유로 작은 풀줄기든 큰 기둥이든, 추한 사람이든 서시든, 사물은 아무리 엉뚱하고 이상야릇한 것이라도, 도의 견지에서 보면 모두 통하여 하나가 된다. 나누어짐이 있으면 이루어짐도 있고, 이루어짐이 있으면 허물어짐도 있다. 모든 사물에는 본래 이루어짐과 허물어짐이 따로 없이 모두 통하는 하나이다. 오로지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만이 모두 통하는 하나를 깨닫고,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차별의) 범주 대신, (양쪽을 포괄하는) '보편적인 것'에 머물 수 있다.

보편적인 것이란 쓸모 있음을 말한다. 쓸모있음이란 통함이고 통함이란 즐김이다. 즐김은 도에 가까움이다. 있는 그대로를 그렇다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줄 모르는 것. 그것을 도라 한다.

 

'코스모스'의 '빅뱅'이 생각났다. 현재 지금의 우주, 그리고 지금의 지구,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은, 최초 고밀도의 작은 물질의 폭발인 '빅뱅'에서 시작하였으므로... 지금은 우리는 많은 모습으로 이 우주와 지구상에 존재하지만, 사실 빅뱅 직 후에는 우리는 그저 단 하나의 물질이었을 것이다.

 

13. ... 그러자 그 사람은 '그러면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고 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명목이나 실질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원숭이들은 성을 내다가 기뻐했다.

 

아침에 셋, 저녁의 넷과 아침에 넷, 저녁의 셋...이 다른 것인가? 그렇지 않음에도 우리는 이 일화의 원숭이처럼 같은 것을 구분하려 하고, 그것에 일희일비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본질을 보면 모두 같은 것, 단 하나에서 시작한 것이다.

 

14. 옛 사람들 중에는 지혜가 지극한 경지에 이른 이들이 있었다. 얼마나 깊은 경지에 이르렀을까? 아직 사물이 생겨나기 전의 상태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이것은 지극하고 완전한 경지로 더이상 덧붙일 것이 없다. 그 다음은 사물이 생겨나긴 했으나 거기에 아직 경계가 없던 상태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 다음은 사물에 구별은 있으나 아직 옳고 그름이 없던 상태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이상적 인간이 도달한 세 가지 경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 모든 분별이 없던 절대초월, '없음'의 경지. 둘째, 사물은 존재하나, 경계가 없어서 '하나'의 상태인 '현존'의 경지. 셋째, 사물이 구분이 있으나 아직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은 경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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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것이 바로 '이것'과 '저것'이 서로를 생겨나게 한다는 '방생(方生)'이라는 것이지.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 됨이 있기에 안 됨이 있고, 안 됨이 있기에 됨이 있다. 옳음이 있기에 그름이 있고, 그름이 있기에 옳음이 있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일방적 방법에 의지하지 않고, (전체를 동시에 볼 수 있는) 하늘의 빛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를 그렇다 함'이다.

(하늘의 빛에 비추어 보면) '이것'은 동시에 '저것'이고, '저것'은 동시에 이것'이다. 성인의 '저것'에는 옳고 그름이 동시에 있고, '이것'에도 옳고 그름이 동시에 있다. 그러면 '저것'과 '이것'은 따로 있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저것'과 '이것'이 상대적 대립관계를 넘어서서 없어지는 경지를 일컬어 '도의 지도리'라 한다. 지도리이기에 회전의 중심에서 무한한 변화에 대응한다. 옳음도 무한한 변화의 하나요, 그름도 무한한 변화의 하나. 그러므로 '무엇보다 (옳고 그름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밝음이 있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밝음', 도덕경에서 노자가 강조했듯이, 이분법적 사고, 편견에 대한 경계를 뜻하는 것 같다. 사물을 한쪽에서만 보는 편견을 버리고, 위에서 전체를 바라보면 동일한 하나의 사물이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두 개념은 같이 존재할 때에만 의미가 성립된다. '이것'은 '저것'이 없을 때는 의미가 없으며, '이것'이란 말은 반드시 '저것'이란 말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이것'이라는 말 속에는 '저것'이라는 말이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죽음과 삶, 옮고 그름, 그리고 도덕경에서 노자가 말한 선악, 미추, 고저, 장단 같은...언뜻 보면 대립하고, 서로 모순되는 개념들이 결국은 상반되고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태극처럼, 서로 다른 거처럼 보이는 백과 흑이 빙글빙글 돌며 서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가 존재할 때에만 다른 하나도 존재가 가능하며, 두 개의 개념은 언제든 보는 관점에 따라 서로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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