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 양생주(養生主)를 시작한다.

 

양생(養生)의 주(主), '생명을 북돋는 일'이다. 오강남 선생님은 그것을,

 

자연의 순리에 따라 거기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다. 지식욕, 자존심, 자기중심주의 같은 일체의 인위적, 외형적인 것을 넘어서서 자연의 운행과 그 리듬에 따라 우리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할 때, 우리 속에 있는 생명력이 활성화하고 극대화해 모든 얽매임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 이른바 '기대지 않는 삶'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1.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습니다. 아는 것에는 끝이 없습니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알려고만 한다면 더더욱 위험할 뿐입니다.

 

정말 완벽한 논리이다. 읽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다. 나의 경솔함, 거만함을 깨달았다. 하루살이가 하루를 온전히 다 살아도 내일을 알 수 없듯...

오강남 선생님은 여기서의 "앎"이란, 이런저런 것을 끝없이 따지고, 이것과 저것을 구별지으려하는 "분별지"를 말한다고 말씀하신다. "분별지"는 자꾸 따지고, 다른 것과 구분지으려 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방해한다. 즉, 지식을 경계해야 하며 직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노자 "도덕경"'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가는 것,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가는 것'이라는 구절과 일맥상통한다.

 

2. 착하다는 일 하더라도 이름이 날 정도로는 하지 말고, 나쁘다는 일 하더라도 벌받을 정도로는 하지 마십시오.

오직 중도를 따라 그것을 기준으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몸을 보전할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

어버이를 공양할 수 있고, 주어진 나이를 다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너무 착하게도 살지 말고, 나쁜 일도 어느 정도는 해도 된다는 것인가? 아닐 것이다. 장자는 선악, 미추 등의 이분법적인 지식을 경계하라고 하였다. 그러면 선악 즉, 착한 일도 나쁜 일도 없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래야 한다고 칭송하는 '착한 일', 세상 사람들이 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계하는 '나쁜 일'만이 있는 것이고, 이런 것들은 "분별지"이기 때문에 그러한 행동을 해야하고, 하지 말아야 됨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더 나아가 세상의 기준, 세상 사람들의 잣대에 얽매여 그것을 기준으로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거나, 맞추지 말라는 것이다. 구속받지 않고, 거침없이 본인의 생각대로 움직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절대자유의 경지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본인의 생각이란 것이 잔꾀에서 나오는 고의, 계략같은 것이 전혀 없이 자발적이고 자연적인 행동에 따르는 것을 말하며, 이를 '자연의 순리를 따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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