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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노암 촘스키의 생각을 읽자"에 이어, 인문학의 생각읽기 6권 "달라이 라마의 생각을 읽자"를 선택하였다. 10권의 시리즈로 이루어져있으나, 이어지는 내용이 아니므로, 읽고 싶은 책부터 읽어도 상관이 없다. 달라이 라마는 어떤 분일까?

 

달라이 라마 티베트의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로서, 중국의 티베트 침공에 저항하여 "티베트의 자치"를 요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국인을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중국인과 티베트인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는 다 연결되어 있고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예로 머그잔을 들어 설명한다. 머그잔 하나가 내 앞에 오기까지, 원재료인 진흙, 도공의 손, 택배기사의 손 등 수많은 존재, 사건, 인연 등이 있었으며, 머그잔은 이러한 연관들의 총합이라고 설명한다. 

 

성인들이 도달한 모든 진리는 일치하는 것일까? 지난번 장자호접지몽 파트를 읽을 때 생각이 들었다. 인용하면,

 

장자가 보는 세계는 모든 사물이 서로 얽히고 설킨, 장주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주가 될 수 있는 상호합일, 상호침투, 상호연관, 상호의존, 상호변화하는 세계를 말하고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를 보자.

 

(중략)...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저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달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중략)...

 

장석주 시인은 대추 한 알을 그저 대추로 보지 않고, 대추를 있게 한 다른 요소들을 보고 있다. 태풍, 천둥, 벼락, 무서리, 땡볕, 초승달 .... 이러한 요소들이 대추 한 알에 들어 있다고 노래한다.



달라이 라마 역시, 눈앞에 보이는 머그잔이 단순히 머그잔이 아니라, 그 안에 많은 사건과 인연들이 담겨 있으며,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그러하니 실체가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무슨 말일까? 이 머그잔을 무한히 작은 요소로 쪼개고 또 쪼개어 미립자 단위까지 쪼개면, 에너지와 파동 정도만 남고 물질적으로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의 개념이다. "공空", 즉 "비어 있는"것이지만 여러 사람들과 여러 관계들과 여러 상황들의 인연의 총합으로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서로가 있기에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생각하면, 자비심, 보리심, 애타심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한 한가지 연습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부정적 상황에 대응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어떤 감정이 떠오르면 그것을 곧바로 좋다, 싫다 이분법으로 분류하려 하지 말고, 한발작 물러서서 현실과 상황을 관조한다. 지금 나의 감정은 무엇으로 인한 것인지, 나의 반응은 적절한 것인지... 그러면 작은 일에 아웅다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문제에 해답이 있다면, 답을 구하고 해결을 하면 될 것이고, 해답이 없다면 고민해봐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행의 반복을 통해 일정 정도의 수준에 이르면 이른바 뇌가소성에 의해 신경세포가 재구성 되어 뇌가 움직이는 방식을 긍정적 방식으로 바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최종적으로 인류의 "행복"을 꿈꾸며,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경외심과, 인간과 자연을 아우르는 보편적 책임의 개념에 바탕을 둔 평화의 철학을 주장해 온" 공적으로 198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대가 자신의 주인이다. 그대의 미래는 온전히 그대에게 달려 있다. 누구도 그대의 내생을 돌봐 줄 수 없으며 현재는 그대의 어깨 위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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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어느 날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보니 다시 장주가 되어 있었다.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일러 '사물의 변화(物化)'라 한다.

 

아주 유명한 이야기이다.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했던 "매트릭스"라는 영화가 이 일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실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듯한 이야기이다. 장자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 또한 꿈에서 깨어나면서,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현실이 아님을 알게 된다.  

 

재미있으면서도 난해한 이야기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나비가 곧 나고, 내가 곧 나비라는 것인가? 이 둘은 어느 것이 꿈인줄 모르므로 구별이 불필요하다는 것인가? 이에 장자는 무슨 구별이 있기는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을 '사물의 변화(物化)'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이 '사물의 변화'가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즉, 장자가 보는 세계는 모든 사물이 서로 얽히고 설킨, 장주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주가 될 수 있는 상호합일, 상호침투, 상호연관, 상호의존, 상호변화하는 세계를 말하고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를 보자.

 

(중략)...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저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달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중략)...

 

장석주 시인은 대추 한 알을 그저 대추로 보지 않고, 대추를 있게 한 다른 요소들을 보고 있다. 태풍, 천둥, 벼락, 무서리, 땡볕, 초승달 .... 이러한 요소들이 대추 한 알에 들어 있다고 노래한다. 태풍, 천둥, 벼락, 무서리, 땡볕, 초승달 그리고 대추는 위에서 말한 상호합일, 상호침투, 상호연관, 상호의존, 상호변화의 관계라 할 수 있다. 태풍이 대추고, 대추가 천둥이면서도 서로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것이 '사물의 변화'이다.

 

그리고 장자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자유롭게 넘나드는 "절대자유"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집착을 버리고, 아집, 편견, 자기중심주의, 오만 등의 태도를 경계해야함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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