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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어느 날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보니 다시 장주가 되어 있었다.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일러 '사물의 변화(物化)'라 한다.

 

아주 유명한 이야기이다.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했던 "매트릭스"라는 영화가 이 일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실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듯한 이야기이다. 장자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 또한 꿈에서 깨어나면서,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현실이 아님을 알게 된다.  

 

재미있으면서도 난해한 이야기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나비가 곧 나고, 내가 곧 나비라는 것인가? 이 둘은 어느 것이 꿈인줄 모르므로 구별이 불필요하다는 것인가? 이에 장자는 무슨 구별이 있기는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을 '사물의 변화(物化)'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이 '사물의 변화'가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즉, 장자가 보는 세계는 모든 사물이 서로 얽히고 설킨, 장주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주가 될 수 있는 상호합일, 상호침투, 상호연관, 상호의존, 상호변화하는 세계를 말하고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를 보자.

 

(중략)...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저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달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중략)...

 

장석주 시인은 대추 한 알을 그저 대추로 보지 않고, 대추를 있게 한 다른 요소들을 보고 있다. 태풍, 천둥, 벼락, 무서리, 땡볕, 초승달 .... 이러한 요소들이 대추 한 알에 들어 있다고 노래한다. 태풍, 천둥, 벼락, 무서리, 땡볕, 초승달 그리고 대추는 위에서 말한 상호합일, 상호침투, 상호연관, 상호의존, 상호변화의 관계라 할 수 있다. 태풍이 대추고, 대추가 천둥이면서도 서로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것이 '사물의 변화'이다.

 

그리고 장자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자유롭게 넘나드는 "절대자유"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집착을 버리고, 아집, 편견, 자기중심주의, 오만 등의 태도를 경계해야함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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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해와 달과 어깨동무, 우주를 끼어 차고, 모두와 하나된다.

모든 것은 혼잡한 대로 그냥 두고, 낮은 자리 높은 자리 무관하다.

사람들 빠릇빠릇, 성인은 어리숙.

만년 세월 온갖 일.

오로지 완벽의 순박함 그대로.

모든 것들이 모두 그러함 그대로.

그리하여 서로가 감싸안는다.

 

성인이란 뭔가 일반인의 상식을 완전히 초월하여 모든 것을 덮는 커다란 존재이면서도, 있는 그대로를 포용하는 어찌보면 어리숙해보인다는 뜻인 것 같다.

 

26. 진나라로 데려갈 때 여희는 너무 울어서 눈물에 옷깃이 흠뻑 젖었지. 그러나 왕의 처소에 이르러 왕과 아름다운 잠자리를 같이하고 맛있는 고기를 먹게 되자, 울던 일을 후회하였다네. 죽은 사람들도 전에 자기들이 삶에 집착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까?

 

우리는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 처하는 것을 두려워 한다.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에 안주하지 말고, 익숙하고 편한 예전의 "나"를 떠나 보내야 한다. 또한 이런 변화는 삶과 죽음처럼 그저 계절의 변화같은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이라 말하고 있다.

 

27. 우리가 꿈을 꿀 때는 그것이 꿈인 줄 모르지. 심지어 꿈속에서 해몽도 하니까. 깨어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게 되지. 드디어 크게 깨어나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한 바탕의 큰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항상 깨어있는 줄 알고, 주제넘게도 그러함을 분명히 아는 체하지. 임금은 뭐고 마소 치는 사람은 뭔가? 정말 꼭 막혀도 한참일세.

 

우리가 꿈을 꿀 때는 꿈인지 모른다. 그리고 깨어나서야 그것이 꿈인 줄 안다. 우리는 꿈 속에서 누구는 왕이고, 누구는 마부이고, 누구는 부자이고, 누구는 가난하고의 꿈을 꾼다. 그리고 그것이 꿈인 줄 모르고 그 안에서 아등바등 살고 있는 것이다.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크게 깨어나야(大覺)"한다. 

 

28. 한 쪽이 옳으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그른 것인가? 두쪽이 다 옳거나 두 쪽이 다 그른 경우는 없을까? 자네도 나도 알 수가 없으니 딴 사람들은 더욱 깜깜할 뿐이지.

 

30. 이처럼 변하기 쉬운 소리에 기대하는 것은 아예 기대하지 않는 것과 같네. 이런 것을 '하늘의 고름'으로 조화시키고 '무한의 변화'에 내맡기는 것이 천수를 다하는 길이지. '하늘의 고름'으로 조화시킨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사람들은 보통 '옳다, 옳지 않다', '그렇다, 그렇지 않다'고 하네. 그러나 옳다고 하는 것이 정말로 옳다면, 옳은 것이 옳지 않은 것과 다르다는 것은 변론할 여지가 없는 일이지. 그렇다고 하는 것이 정말로 그렇다면, 그런 것이 그렇지 않은 것과 다르다는 것 또한 논쟁할 여지가 없는 일 아닌가. 햇수가 더해 세월 가는 것을 잊고, (옳다 그르다) 의미를 따지는 일을 잊어버리게. 구경의 경지로 나아가 거기에 머물도록 하게.

 

한 가지 사물을 보는 데도, 보는 방향, 관점에 따라 다르게 말할 수 있다. 즉 관점에 따라 각각이 다 맞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알아 '하늘의 고름'으로 조화시키고, 그저가는 대로 순리에 맞게 변화에 내맡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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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있음'이 있으면 '없음'이 있게 마련이다. 또 '있음' 이전의 그 '없음'이 아직 있기 이전이 있어야 한다. 또 없음이 아직 있기 이전이 아직 있기 이전, 그것이 아직 있기 이전의 없음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데 갑자기 있음과 없음의 구별이 생긴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18. 모든 것이 원래 하나인데 달리 무엇을 더 말하겠느냐? ... 이처럼 계속 뻗어가면 아무리 셈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그 끝을 따라 잡을 수가 없을 것이니 보통 사람들이야 일러 무엇하겠나?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가도 이처럼 금방 셋이 되는데, 하물며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갈 때야 일러 무엇하겠나? 그러니 부산하게 좇아 다니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그러하다고 받아들이자.

 

무언가에 대해 언어로써 정의한 순간, 그것은 큰 도로부터 분리되어 "그것"과 "그것이 아닌 것"이 생기게 된다. 다시 이 개념들은 무수히 확장하게 된다. 이렇게 구분하고 따지고 시비를 가리면서 "부산하게 쫓아다니지 말고", 그것을 넘어서 직관적으로 "있는 그대로를 그러하다"고 받아들이자. 사실 원래 다 하나였으므로.

 

19. 사실 도에는 경계가 없고 말에는 실재가 없다. 말 때문에 분별이 생겨나는데 이 분별에 대해 말해 보기로 하자.

 

20. 무릇 위대한 도는 이름이 없다. 위대한 변론은 말이 없다. 위대한 인은 편애하지 않으며, 위대한 겸손은 밖으로 드러내는 겸양이 아니다. 위대한 용기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 이 다섯가지는 본래 둥근 것이지만 잘못하면 모가 난다. 그러므로 알지 못함을 알고 멈출 줄 아는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다.

 

결국 말은 분별을 일으킬 뿐, 무언가를 정의하는 데에 완전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결국 도에 대해서 말하려면 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는 것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22. ... 도대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23. 모장이나 여희는 남자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지만, 물고기는 보자마자 물 속 깊이 들어가 숨고, 새는 보자마자 높이 날아가 버리고, 사슴은 보자마자 급히 도망가 버린다. 이 넷 중에서 어느 쪽이 아름다움을 바르게 안다고 하겠는가?

내가 보기에, 인의의 시작이나 시비의 길 따위의 것은 겨룩 이처럼 주관적 판단 기준에 따라 걷잡을 수 없이 번잡하고 혼란한데 내 어찌 이런 것이나 따지고 앉아 있겠는가?

 

우리가 만든 개념들이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상대적인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의와 시비 또한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환경과 상황에서 형성된 임의적, 주관적 규범이지 절대적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24. 지인至人은 이로움이니 해로움이니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습니까? ... 그에게는 삶과 죽음마저 상관이 없는데, 하물며 이로움이니 해로움이니 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지인은 절대의 세계와 하나가 되어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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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이와 같은 이유로 작은 풀줄기든 큰 기둥이든, 추한 사람이든 서시든, 사물은 아무리 엉뚱하고 이상야릇한 것이라도, 도의 견지에서 보면 모두 통하여 하나가 된다. 나누어짐이 있으면 이루어짐도 있고, 이루어짐이 있으면 허물어짐도 있다. 모든 사물에는 본래 이루어짐과 허물어짐이 따로 없이 모두 통하는 하나이다. 오로지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만이 모두 통하는 하나를 깨닫고,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차별의) 범주 대신, (양쪽을 포괄하는) '보편적인 것'에 머물 수 있다.

보편적인 것이란 쓸모 있음을 말한다. 쓸모있음이란 통함이고 통함이란 즐김이다. 즐김은 도에 가까움이다. 있는 그대로를 그렇다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줄 모르는 것. 그것을 도라 한다.

 

'코스모스'의 '빅뱅'이 생각났다. 현재 지금의 우주, 그리고 지금의 지구,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은, 최초 고밀도의 작은 물질의 폭발인 '빅뱅'에서 시작하였으므로... 지금은 우리는 많은 모습으로 이 우주와 지구상에 존재하지만, 사실 빅뱅 직 후에는 우리는 그저 단 하나의 물질이었을 것이다.

 

13. ... 그러자 그 사람은 '그러면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고 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명목이나 실질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원숭이들은 성을 내다가 기뻐했다.

 

아침에 셋, 저녁의 넷과 아침에 넷, 저녁의 셋...이 다른 것인가? 그렇지 않음에도 우리는 이 일화의 원숭이처럼 같은 것을 구분하려 하고, 그것에 일희일비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본질을 보면 모두 같은 것, 단 하나에서 시작한 것이다.

 

14. 옛 사람들 중에는 지혜가 지극한 경지에 이른 이들이 있었다. 얼마나 깊은 경지에 이르렀을까? 아직 사물이 생겨나기 전의 상태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이것은 지극하고 완전한 경지로 더이상 덧붙일 것이 없다. 그 다음은 사물이 생겨나긴 했으나 거기에 아직 경계가 없던 상태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 다음은 사물에 구별은 있으나 아직 옳고 그름이 없던 상태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이상적 인간이 도달한 세 가지 경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 모든 분별이 없던 절대초월, '없음'의 경지. 둘째, 사물은 존재하나, 경계가 없어서 '하나'의 상태인 '현존'의 경지. 셋째, 사물이 구분이 있으나 아직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은 경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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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것이 바로 '이것'과 '저것'이 서로를 생겨나게 한다는 '방생(方生)'이라는 것이지.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 됨이 있기에 안 됨이 있고, 안 됨이 있기에 됨이 있다. 옳음이 있기에 그름이 있고, 그름이 있기에 옳음이 있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일방적 방법에 의지하지 않고, (전체를 동시에 볼 수 있는) 하늘의 빛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를 그렇다 함'이다.

(하늘의 빛에 비추어 보면) '이것'은 동시에 '저것'이고, '저것'은 동시에 이것'이다. 성인의 '저것'에는 옳고 그름이 동시에 있고, '이것'에도 옳고 그름이 동시에 있다. 그러면 '저것'과 '이것'은 따로 있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저것'과 '이것'이 상대적 대립관계를 넘어서서 없어지는 경지를 일컬어 '도의 지도리'라 한다. 지도리이기에 회전의 중심에서 무한한 변화에 대응한다. 옳음도 무한한 변화의 하나요, 그름도 무한한 변화의 하나. 그러므로 '무엇보다 (옳고 그름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밝음이 있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밝음', 도덕경에서 노자가 강조했듯이, 이분법적 사고, 편견에 대한 경계를 뜻하는 것 같다. 사물을 한쪽에서만 보는 편견을 버리고, 위에서 전체를 바라보면 동일한 하나의 사물이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두 개념은 같이 존재할 때에만 의미가 성립된다. '이것'은 '저것'이 없을 때는 의미가 없으며, '이것'이란 말은 반드시 '저것'이란 말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이것'이라는 말 속에는 '저것'이라는 말이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죽음과 삶, 옮고 그름, 그리고 도덕경에서 노자가 말한 선악, 미추, 고저, 장단 같은...언뜻 보면 대립하고, 서로 모순되는 개념들이 결국은 상반되고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태극처럼, 서로 다른 거처럼 보이는 백과 흑이 빙글빙글 돌며 서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가 존재할 때에만 다른 하나도 존재가 가능하며, 두 개의 개념은 언제든 보는 관점에 따라 서로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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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유가 말했습니다. "땅이 부는 퉁소 소리란 결국 여러 구멍에서 나는 소리군요. 사람이 부는 퉁소 소리는 대나무 퉁소에서 나는 소리인데,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란 무엇입니까?"

자기가 대답했습니다. "온갖 것에 바람을 모두 다르게 불어넣으니 제 특유한 소리를 내는 것이지. 모두 제 소리를 내고 있다고 하지만, 과연 그 소리가 나게 하는 건 누구겠느냐?"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는 결국, 땅이 부는 퉁소 소리와 사람이 부는 퉁소 소리를 나게 해주는 땅의 구멍과 대나무의 구멍을 통과하는, 이 모든 공간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바람같은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이를 통해 장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가 땅의 구멍을 통과하여 "땅이 부는 퉁소 소리"가 되고, 대나무의 구멍을 통과하여 "사람이 부는 퉁소 소리"가 되듯이 모두 제각각의 소리같지만, 사실 그 근본에는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는 모든 소리들을 꿰뚫는 단 하나의 소리이면서도, 어떤 구멍을 통과하느냐에 따라 제각각 다르게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제각각의 소리만 들을 줄 알고, 그 바탕의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는 들을 줄 모른다. "나"를 덮고 있는 분별들을 떨쳐내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될 때,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4. 잠잘 때는 꿈으로 뒤숭숭하고, 깨어 있을 때는 감각기관이 일을 시작하고.

 

한 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머릿속의 잡념들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온갖 잡다한 감정들을 말하고 있다.

 

5.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염려와 후회, 변덕과 고집, 아첨과 방자, 터놓음과 꾸밈. ... 우리 안에 밤낮으로 번갈아 나타나지만,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지. 이렇게 아침 저녁으로 (여러가지 마음의 변화가) 나타나기에 우리가 삶을 유지하는 것. 이런 것들이 없으면 내가 있을 수 없고, 내가 없으면 이런 것들이 나타날 턱이 없지. 이야말로 진실에 가까운 것이나 이런 변화가 나타나게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구나.

 

그러한 온갖 감정들을 느끼고 있는 것이 나인가? 그럼 나를 잃으면 그런 잡념들을 놓아버릴 수 있는 것이다. 호흡에 집중하며, 떠오르는 잡념에 대해 아무 감정을 가지지 말고 바라보라 하는 최근의 명상의 요점과 동일하다. 불교의 참선과도 유사하다.

 

6. 참주인이 분명히 있는데, 그 흔적을 잡을 수 없구나. 참주인이 작용하는 것은 믿을 만한데,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셈이지.  ... 우리가 그 실체를 알든 모르든 그 참모습에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다.

 

참모습...좋고 나쁨, 더 필요하고 불필요하고의 분별이 들어가지 않고 그냥 존재하는 그대로가 참모습인 것이다. 모두 인연따라 순리에 따라 그리 존재하는 것이므로.

 

7. 어차피 돔도 쇠하고 마음도 그러게 되고 마니 정말 애처롭기 그지없는 일 아니겠느냐?

 

몸도 마음도 참주인이 아니다.

 

9. 도는 자질구레한 이룸(成)에 가리고, 참말은 현란한 말장난에 가리었다. 그리하여 유가와 묵가가 시비를 다투어, 한 쪽에서 옳다 하면 다른 쪽에서 그르다 하고, 한 쪽에서 그르다 하면 다른 쪽에서 옳다 하는 것이다. 이들이 그르다 하는 것을 옳다 하고, 이들이 옳다 하는 것을 그르다 하려면, 무엇보다도 (이들의 옳고 그름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밝음(明)이 있어야 한다.

 

모두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들처럼 자기가 만져 본 일방적인 부분적인 단견(短見)을 내세워 서로 분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문제를 해결하려면 편견, 분별에서 벗어나 코끼리를 전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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