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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여기 하얀 기둥이 있습니다.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붉은색 안경을 낀 사람은 기둥이 붉다고 믿습니다. 또 푸른색 안경을 낀 사람이라면 푸른색이라고 믿을 겁니다. 그 두사람이 만나면 서로 기둥이 빨간색이니 푸른색이니 하고 다툴게 뻔합니다. 이게 상을 짓고 상에 집착하는 중생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상에 집착하는 이유는 집착하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그것이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내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을 실제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누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 눈에 빨갛게 보이듯이 그의 눈에는 파랗게 보인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대립과 갈등을 피할 수 있습니다.

 

어렵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실제가 아니라 그저 보이는 상일 뿐이라니. 그리고 사람마다 다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처럼 상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자체가 '상을 내려 놓아야 한다'는 상을 하나 더 보태고 있다고 지적하고 계시다. 어렵다.

 

32.

내가 상대를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해준다는 상을 가지고 있으면 자꾸 그 대가를 바라게 되고, 바라는 그 마음이 채워지지 않으면 갈등이 생깁니다. 더군다나 상대가 원하는 걸 해주는 것도 아니고 자기 생각에 좋아 보이는 걸 해주면서 '내가 너를 위해 이렇게 애쓰고 있다'는 생각에 빠지면 갈등은 피하려야 피할 수가 없습니다. 내 보기에 좋은 것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심입니다.

 

이런 이치를 공부하고도 막상 일상에서는 눈에 보이는 모습에 집착하고, 귀에 들리는 소리에 집착하고, 코에 맡아지는 냄새에 집착하고, 혀에 닿는 맛에 집착하고, 손에 느껴지는 감촉에 집착하고, 머리로 인식되는 알음알이에 집착하는 게 현실입니다. 이제는 그만 '눈 뜨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꿈속에서 아무리 좋은 일이 있었더라도 눈을 떠 보면 다 꿈일 뿐입니다. 좋은 일도 다 꿈같은 줄 안다면 나쁜 일이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변 사람들과 부딪치는 자신을 돌이켜보고 순간순간 일어나는 내 마음을 관찰해야 합니다.

 

이렇게 금강경을 완독하였다.

8월 24일에 시작하여 한달이 조금 넘게 걸렸다.

불교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종교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 경전 안에는 철학 이상의 생각들이 많이 담겨 있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내용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도덕경을 먼저 시도하였는데, 두 책에서 말하는 내용이 상당히 유사하다. 도덕경도 금강경도 다른 분들께서 해석한 책들을 추가로 구입하였다. 도덕경은 서양의 시각으로 해석한 웨인 다이어의 해설 본을 구입하였고, 금강경은 도올 선생님의 해설 본을 추가로 구입하였다. 다시 여러 번 읽어 보고 싶고, 그래야만 더더욱 나를 갈고 닦고, 처음보다 더 많이 알 수 있을 것 같다.

 

좋은 책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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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물은 그릇의 모양에 따라 그 형태가 바뀝니다. 스스로 어떤 모양이 되겠다는 아무런 의지도 작용하지 않습니다. 또한 텅 비어 있는 그릇은 거기에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 그 인연에 조응해서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 되고 국을 담으면 국그릇이 됩니다. 그와 같이 여래는 모든 욕구를 여의었으니, 그 행은 물과 같고 그릇과 같은 무위의 행입니다.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으므로 행함없이 행하는 무소행無所行을 실천하고 무위의 모습으로 무주상보시를 행하여 무루복을 짓습니다.

 

그 뒤로 수행자들은 분소의를 빨아서 입게 되었습니다. 그냥은 더러워서 도저히 입을 수가 없어서 깨끗하게 빨아 입는 게 아니라 인연에 따라 쓰임이 더 적절하도록 빨아서 입기로 한 것입니다. 그처럼 '이래야 된다'라고 고집할 바가 없기에 분별이 끊어진 상태에서 인연따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집착하지 않고, 분별을 버리라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으라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다. 인연따라 순리에 따라 나를 흘러가게 끔 놓아두는 것이다.

 

화가 났을 땐 화난 대로, 슬플 때는 슬픈 대로, 거기에 빠져들지도 말고 거부하지도 말고 파도가 일어나는 모습을 바라보듯이 내 마음을 가만히 지켜보는 겁니다. 이런 마음이 일어나야 된다, 이런 마음은 일어나면 안 된다, 그런 관념을 내려놓고 '지금 이런 마음이 일어나는구나' 하고 지켜보면 마음의 움직임에 꺼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냥 나의 감정을 지켜보는 것이다. 감정에 반응하지 말고.

 

30.

모두 같은 것을 근본으로 하여 다른 것이 되며, 하나를 근본으로 해서 하나가 아닌 것이 나타나는 이치입니다. 근본 이치에서 본다면 본래 같은 것도 없고 다른 것도 없습니다. 지금 모습을 드러낸 인연에 따라 나타나는 이름일 뿐이지, 같거나 다르다고 할 만한 본질적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존재에서 서로 다른 많은 존재가 나오고, 서로 다른 많은 존재들이 모여서 하나의 세계를 이룹니다. 하나로부터 많은 것이 나오고 많은 것으로부터 하나가 나옵니다. 하나는 하나 아닌 것으로 돌아가고, 모든 것은 모든 것이 아닌 것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다, 둘이다 하는 구분은 다만 지금 눈에 보이는 현상에 불과하며 궁극적으로 하나와 둘을 판단할 만한 실체는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보면 실체가 존재하는 것 같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아무 실체없이 텅 비었음을 알게 됩니다. 또 아무 실체없이 텅 비어 잇는 것처럼 보이는 거기로부터 온갖 현상이 모습을 드러냄을 알게 됩니다. 티끌은 주변 세계와의 연관속에서 그때그때 다른 성질을 드러내기도 하고 전혀 새로운 물질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 속을 보면 텅...비어 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는 욕심, 집착, 감정을 느끼고 번뇌한다.

 

내가 지금 세상을 보는 관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집니다. 주변 조건에 매달려서 사느냐, 아니면 내가 처한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사느냐의 선택은 순전히 자신의 몫입니다. 늘 나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나는 그대로 두고 밖을 바꾸겠다고 하면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어떻게 반응할지, 어떻게 대처할지, 모든 것은 내가 결정할 수 있고, 나에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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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보살은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김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이웃사람이 곡식을 나눠달라고 찾아오면 망설이지 않고 내줍니다. 보살은 이 세상 모든 존재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어서 누구든 필요한 사람이 쓰는 게 당연하다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기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세상 만물이 다 그것으로 숨을 쉬며 살아가고, 태양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세상 만물이 다 그 온기에 의지해서 살아갑니다.

또 보살의 농사는 수확에만 매달리지 않습니다. 수확만 바라보는 사람은 수확에 이르는 과정이 참아내야 할 인고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보살은 농사짓는 그 과정이 모두 즐거움이므로 순간순간을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거둬들인 수확은 이미 삶의 즐거움을 누리고 남은 찌꺼기일 뿐입니다. 그러니 누가 필요하다고 하면 기꺼이 나눠줍니다.

인생도 등산과 같습니다. 좋은 것도 내 인생이고 나쁜 것도 내 인생입니다. 바라는 대로 되는 것도 내 인생이고,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것도 내 인생입니다. 그처럼 나의 모든 시간이 소중한 내 인생의 일부임을 알고, 순간순간 기쁨을 누리며 사는 지혜가 나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듭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생각났다. 그는 독실한 불교신자였고, '인간의 삶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큰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고 말하였다. 실제로 그의 삶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그저 받아들이며 나아갈 뿐이었다.

 

갓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엄마의 마음도 보살의 마음과 같습니다. 바라는 마음 없이 베푸는 보살의 마음입니다. 엄마라면 누구나 그런 마음을 냅니다. 그 마음을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닙니다. 이렇듯 엄마가 보살의 마음을 가지는 이유는 아이와 엄마가 본래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고 네가 나인 두 사람 사이에는 내가 너를 보살핀다고 생색내는 마음, 내 공덕을 알아달라는 마음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습니다. 이렇게 일체중생이 다 한몸인 줄 알면 복을 짓고도 받을 복이 없는 보살의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게 됩니다.

 

도덕경 역시, 만물이 보이지 않는 道에서 시작되었고, 道로 이어진 하나라고 말한다. 우리는 다 이어져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다. 라는 말을 많은 책에서 보아 왔는데, 가장 와닿는 비유다. 엄마와 아기. 본래 하나이기때문에, 무주상보시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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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상에 집착해 실상을 보지 못하고 진실을 듣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는 사람의 말일지라도 그 속에서 진리를 들을 수 있고, 세상 모두가 우러러보는 사람의 말일지라도 그릇된 견해일 수 있습니다. 공부하는 수행자라면 모름지기 이 점을 놓치지 말고 바르게 판단하는 안목을 키워야 합니다.

돌이켜 보면, 나보다 아랫사람,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의 현 상황에 대해 조언을 하거나, 태클을 걸 때면, 그게 옳은 말이라고 머리로 생각하면서도 괜히 기분이 나빠져서 더 화내고 일부러 더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있었다. 상에 집착하지 않았다면, 좀 더 나은 길로 가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욕심이 아니라 원願을 품은 사람은 바라는 바를 이루려고 노력하되 괴로움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이루고자 하는 것이 실패했을 때 낙담하지 않고 다시 노력하고, 또 안되면 다른 방법으로 노력하고, 다만 그렇게 계속할 뿐입니다. 그러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이라는 판단이 서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툭툭 털고 다른 일을 합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누린 즐거움과 행복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이 아닌 욕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형상에 집착합니다. 또 그럴수록 깨달음의 길은 점점 더 멀어집니다.

 

욕심과 원의 차이.. 잘 모르겠다. 그래도 그 자세의 차이만은 알 것 같다.

 

27.

부와 명예와 가족과 친구는 고통의 원인도 아니고 행복의 원인도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늘 그 속을 헤매며 한 극단과 다른 극단을 왔다갔다합니다. 행복의 원인이라고 했다가 그게 잘 안되면 고통의 원인이라고 했다가, 그렇게 평생을 헤매며 삽니다. 이것이라는 상이든 이것이 아니라는 상이든, 그렇게 그 속을 오락가락해서는 인생의 괴로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일체 법이 무아'라는 것과 '일체 법이 없다'는 것은 그 뜻이 전혀 다릅니다. 그 둘을 혼동해선 안 됩니다. 우리가 약이라고 부르는 물질은 실은 그 안에 약이라는 실체나 근원이 있지는 않습니다. 약이라는 실체가 없다는 것은 이것이 독이라는 뜻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도 아닙니다.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영원불멸하는 고정된 성품이나 역할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정한 조건과 인연 속에서 때로는 약성으로 작용하고 때로는 독성으로 작용하는 것이 참 모습입니다. 다만 지금 여기에서의 쓰임에 따라 약이라 불릴 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와 현상은 '이것'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동시에, 놓인 상황과 인연에 딸서는 '이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만 '이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정한 조건과 인연 속에서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 작용하고 이름지어질 뿐, 그 이름에는 고정된 성품이나 역할이 없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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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태양이 온 세상을 비추어 살리듯이, 물이 만물의 생명을 북돋우듯이, 공기가 생명을 숨쉬게 하듯이, 중생을 교화하되 교화한다는 생각이 없는 행,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한다는 생각이 없는 행이 무위의 행, 함이 없는 행입니다.

 

부처님께서 말하는 무주상보시라는 것이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하는 무위와 유사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이 세상에 저절로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단지 내가 그 일의 원인을 모를 뿐입니다. 모든 일은 신의 뜻도 아니고 전생 때문도 아니고 우연히 일어난 일도 아닙니다. 그러니 내가 처한 상황이나 사건이 나와 관련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내가 마땅히 겪어야 하는 일이라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공부의 시작입니다.

 

모든 것은 다 순리에 따라 흐르고 일어나니, 순리에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가?

 

마음 속에 바람이 불지 않도록 정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내 자신을 차분히 관찰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고요히 살펴보면 순간순간 무수한 마음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화가 나고 미움이 일어나고 슬픔이 생기는 내 마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화를 내며 괴로워하는 사람은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 화의 책임이 어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내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화는 왜 일어날까요? 화는 내가 옳고 네가 틀렸다는 생각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옳고 그름을 가르는 이유는 사사건건 매사를 분별하는 습관때문입니다. 입으로는 객관을 주장하지만 사실은 항상 내 생각과 내 취향과 내 기준에 따라 분별합니다. 이런 주관적인 옳고 그름의 분별이 생기면 그 분별에 따라 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화가 나는 이유가 내가 옳다는 생각에 있는 줄을 알고, 그 분별의 기준이 공한 줄을 알면 어리석은 인연의 씨앗을 뿌리는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상대가 아무리 날카로운 말을 하고 어떤 경계가 온다 해도 내가 상을 버려 허공처럼 텅 비어 있다면 상처받을 일이 없습니다.

 

허공처럼 텅 비어 있다면....깊은 울림을 주는 구절이다.

 

나를 비워서 인을 없앤다면 어떤 연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선연善緣이라면 증강시키고, 악연惡緣이라면 순화시킵니다. 그렇게 내 씨앗을 고쳐낙는 것이 수행의 요체고, 이런 수행은 주변 사람들을 모두 행복하게 합니다. 내가 행복해지는 길과 네가 행복해지는 길이 둘로 나뉘지 않고 한 길에 놓여 있습니다.

 

주변을 행복하게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플러스의 기운을 주게하는 사람이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그 분의 말씀이 떠올랐다.

 

벽에 부딪친 공은 반드시 튀어나오기 마련이고, 그 이치를 아는 사람은 공이 튀어 돌아온다는 사실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결과가 지금 즉시 나타나지 않는다해도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기에 의연한 태도로 결과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과보가 있느냐 없느냐, 오늘 오느냐 내일 오느냐 전전긍긍하지 않습니다.

 

의연함, 일희일비하지 않는 자세를 갖고 싶은데, 여기에 답이 있는 것 같다. 인연과因緣果를 안다면, 초연해질 수 있는 것이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는 도덕경의 구절이 떠올랐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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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금강경 사구게

제5 여리실견분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

제10 장엄정토분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

제26 법신비상분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

제32 응화비진분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

 

이 사구게가 전하는 말씀은 모두 한가지입니다. 모든 상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상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비로소 세상의 참모습을 보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어젯밤 꿈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더라도 한순간 눈을 번쩍 떠서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면 고통은 사라집니다. 모두 꿈이었으니 괴로워할 일이란 본래 없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모든 상이 공함을 알면 그만입니다.

 

제법이 공함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한없이 무거웠던 등짐도 눈을 뜬 뒤에는 조금도 나를 힘들게 하지 못합니다. 아니, 그 짐은 본래 짐이 아니었음을 보게 됩니다. 학벌이 낮다, 병이 들었다, 이혼을 했다, 자식이 없다, 아기를 못 낳는다, 사업에 실패했다, 실직을 했다, 어떤 일도 다 그렇습니다. 눈곱만큼도 나를 괴롭힐 수 없고, 눈곱만큼도 나를 더럽힐 수 없고, 눈곱만큼도 나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내 삶에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내 삶에 흠집이 되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내 모습과 처지와 조건을 바꾸어서가 아니라 지금 이 모습 이 조건 그대로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해탈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집착을 버리라는 것, 집착하지 말라는 것은 도덕경에서 말하는 무위와 비슷한 것 같다. 집착과 작위는 다 내 생각이 만들어 낸 것. 집착, 작위에 의한 행동을 버릴 때, 순리의 흐름에 따라 무엇에도 거침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어떤 것도 나를 가두어둘 수 없는 해탈, 대자연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다만, 어떻게 하면 생각을 멈추고 집착과 작위를 짓지 않을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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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정심행선(淨心行善)은 물이 자기의 모습을 고집하지 않고 담기는 그릇에 따라 모양을 바꾸듯 그렇게 자연스러운 행을 말합니다.

 

정심은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무주의 마음이고 어떠한 형상도 짓지 않는 무상의 마음입니다. 또한 일체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무념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생각을 일으킬지라도 집착의 그림자를 달지 말아야 하고, 모양을 짓더라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며, 또한 그 모양이 영원하지 않음을 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형상은 한순간의 모습에 불과해 번갯불 같고 그림자와 같습니다. 모든 모양은 공하여 단지 허깨비일 뿐인 도리를 알 때 비로소 본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바람불고 비오고 햇빛 비쳤다가 눈이 오고, 그렇게 여러 모습으로 흘러가는 게 세상입니다. 본래 그런 세상의 움직임을 가지고 시비하고 온갖 상을 짓고 거기에 빠져 죽네 사네 아우성을 치는 게 중생입니다. 그런 이치를 안다면, 모든 괴로움이 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안다면, 정말로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손에 꽉 움켜쥐고 있는 자기 생각을 내려놓으면 됩니다. 이것이 방하착放下着입니다.

 

다람쥐가 숲속을 뛰어다닐 때, 이 바위와 저 바위는 왜 이리 멀고 이 돌은 왜 이렇게 크고 이 나무는 왜 이렇게 높냐고 따지면서 다닙니까? 나무가 높으면 높은 대로 열심히 올라가고, 작으면 작은 대로 재빠르게 올라가고, 사이가 많이 벌어진 바위는 있는 힘껏 펄쩍 뛰고, 가까이 붙어 있는 바위는 부지런히 걷고, 아무 불평불만 없이 주어진 조건 그대로 살아갑니다. 사람들처럼 하나하나 다 따져가면서 불평불만을 늘어놓자면 다람쥐도 아마 숨이 넘어갈 겁니다.

 

머리가 아프도록 생각을 많이 하고 괴로워하는 건 단지 오래도록 습관이 되어버린 망상이 나도 모르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꽉 움켜쥐고 있는 자기 생각만 내려놓으면 그만입니다.

 

정말 너무 평범하고 당연한 자연의 모습에서 큰 가르침을 찾아내어 말씀하고 계시다. 물, 자연...그렇다 억지가 아닌 그저 순리대로 흐르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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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여기 칼이 있습니다. 이 칼은 흉기일까요? 아닙니다. 이 칼은 흉기가 아니라 수술실에서 사람을 살리는 데 쓰는 도구입니다. 그러면 이 칼은 유용한 도구입니까? 아닙니다. 이 칼은 사람을 다치거나 죽게 만드는 흉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칼은 유용한 도구도 아니고 흉기도 아닙니다. 칼은 본래 공입니다. 칼이 본래 공하므로 어리석은 사람이 잡으면 흉기가 되고 의로운 사람이 잡으면 사람을 살리는 보배의 검이 됩니다.

한 생각에 사로 잡혀 있으므로 중생이고, 한 생각 돌이키면 그는 이미 부처입니다. 마음이 깨달으면 부처요, 마음이 어리석으면 중생입니다.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지 않으니 다 일심에서 일어나는 모습입니다.

 

칼이라는 한 가지 사물이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를 모두 의미할 수 있다. 둘 다 같은 칼인데, 괜히 사람의 분별을 해 놓은 것이다. 칼은 처음부터 그냥 칼일 뿐이다. 어떤 일어난 일도 좋고 나쁨이 없다. 그냥 일어난 것인데, 사람이 행운이니 불운이니 분별을 할 뿐이다.

 

22.

만일 내가 한 법도 정해져 있지 않음을 알고 나라는 고집을 완전히 버린다면, 나는 그 무엇도 정해진 바가 없는 까닭에 오히려 무엇이든지 될 수 있습니다. 텅 빈 그릇에는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전체에서 바라보면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고 있다고, 그것이 마치 자기만 아는 값진 지식인 것처럼, 절대 법칙, 자신만의 규칙인 것처럼 그것에만 의지하는 것은, 그저 작은 지식에 집착함으로써, 더 큰 앎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다.

 

고정관념과 고집을 놓아버릴 때, 그의 존재는 현재의 환경 속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상황은 이미 일어났다.'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명제입니다.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한 상황이 지금의 내 현실입니다. '다른 사람과 결혼했으면 좋았을걸'하고 생각한들 모두 번뇌에 불과합니다. '나는 저 사람과 맞지 않아'하고 고집하는 마음은 불행을 자초합니다. 세상에 나와 맞지 않는 사람, 나와 맞지 않는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와도 맞추어 살 수 있습니다.

 

어렵게 배운, 깨친, 경험한 지식도, 그것에만 집착하고 아집에 빠진다면 그저 고정관념이고 고집일 뿐이다. 다 흘러가게 놓아야 한다. 그래야 새로이 필요한 새로운 앎이 자리하게 된다.

 

내가 처한 조건에서 나를 고집하지 않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는 그 마음이 아상을 소멸해 가는 수행입니다. 이 것이 부처의 법이며 금강경에서 설하는 가르침의 요체입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한 삶을 살아가되, 나를 고집해 잘났다거나 못났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어리석은 분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끊임없이 부딪치고 나를 고집하고 경계에 휘둘리는 일상의 순간순간을 포착해 거기에 반응하는 내 일거수 일투족을 알아차리고 마음의 뿌리를 찾아간다면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부처님의 참된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정관념과 고집을 버리고(절대적인 법칙이 없음을 알고...라고 표현해도 될지는 아직까지 모르겠음), 물처럼 머문 바 없이, 집착하는 바 없이, 모두가 하나임을 알고 분별을 버리라는 것이다. 또한 아직도 이렇게 주변에 맞추어(어쩌면 노자가 말씀하시는 순리대로 사는 것) 사는 것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한 삶"과 연결되는 건지는 매끄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다만, 그러한 말씀이 내가 사회생활을 하며, "아 저 사람은 자존심도 없나? 저 사람은 숨막혀서 어떻게 사나? 저렇게 시키는 거 다하고, 저렇게 힘든 사람을 다 맞춰주고...저렇게 까지 살아야 하나?'라고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이런 마음이었구나...라고 조금 이해되게 하는 부분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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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나와 네가 연기된  하나의 몸임을 알고 내가 너를 제도하는 것이 아님을 알면, 거기에는 교화한다는 생각도 없고 제도한다는 생각도 없고 바라는 마음도 없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머무를 데가 없습니다. 발에 가시가 박혔을 때 머리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입이 '아야!' 소리를 내고, 눈이 가서 살펴보고, 손이 가시를 골라 빼내는 것과 같습니다. 중생과 나를 구분하지 않으므로 중생의 문제가 곧 내 문제니 다만 스스로 행할 따르입니다.

 

마치 한 몸처럼 다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머문 바 없이 마음을 내면 되는 것이다.

 

만약 더러움의 씨앗, 깨끗함의 씨앗이 존재한다면 더러움은 언제나 더러움에만 머물러야 하고 깨끗함은 늘 깨끗함으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더럽다고 할 본질도 깨끗하다고 할 본질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하가 손가락질하던 유녀들도 청정한 수행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갖가지 관념의 벽, 분별의 다리가 끊어질 때만이 맑고 투명한 지혜의 눈이 열리고, 비로소 그때 진정한 여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래는 지혜의 눈으로 보는 존재의 참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물은 본래 자기 모양이 없습니다. 담기는 그릇에 따라 모양을 만들어냅니다. 그때그때 모습이 바뀌므로 어떤 대상과도 마찰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막으면 고이고, 차면 넘치고, 이쪽을 막으면 저쪽으로 흐르고, 사방이 막히면 조용히 기다립니다. 이러한 물의 모습이야말로 자기 모양을 갖지 않는 전형이라 할 만합니다.

규정하고 집착하는 마음을 풀어버리는 것이 상을 떠나는 길, 모양을 떠나는 길입니다. 마음이 물처럼 흘러갈 때 우리는 점점 더 자유로운 상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상이 상이 아님을 알 때 깨달음을 얻는 이치입니다. 제상이 구족하다는 가르침은 구족하다고 규정할 기준이 본래 없다는 뜻이며, 고정된 상이 본래 없으므로 '이것을 하라'거나 '이것을 하지 마라'는 가르침도 다만 인연에 따라 생길 뿐입니다.

 

도덕경에서 노자가 말씀하신 물처럼 순리에 따르는 삶이, 금강경에서는 부처님께서 특정 상에 집착하지 않는 삶으로 말씀하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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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부처와 중생, 번뇌와 보리, 주관과 객관, 본질과 현상을 둘로 나누어 모양을 지으면 그것은 상이 되어 버립니다. 일체가 한 몸이고 하나임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일체동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늘 사랑받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하고 도움받고 싶어합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얻고자 합니다. 삶의 괴로움은 이렇게 남에게 의지하고 기대하는 마음, 얻으려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해지고 싶은 이는 얻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고 이해하고 베풀며 남을 위하는 마음을 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입니다.

그러나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을 세워 실천하더라도 내가 지금 중생을 제도한다는 마음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나와 중생을 구별하고 내가 중생을 제도한다는 생각은 내 마음이 일으키는 분별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내 분별이 사라지면 세상은 있는 그대로 청정하고 모든 사람이 지금 그대로 완전한 부처임을 볼 수 있습니다. 장엄할 국토도 없고 제도할 중생도 없는 이치가 이와 같습니다.

 

계속하여 상을 짓는 것, 구분하는 것, 분별심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

 

본래부터 복이라는 게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이라고 부를 뿐 정해진 복의 성질이란 없습니다. 재앙의 성질 역시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복이라고 하는 그것이 사실은 재앙일 수도 있고, 세상 사람들이 재앙이라고 말하는 그 일이 사실은 복일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복과 재앙을 거꾸로 잘못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재앙의 성질도 복의 성질도 아무 정해진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제법이 공한 이치가 그것입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임하느냐에 따라 온갖 것이 다 복이 되기도 하고 온갖 것이 다 재앙이 되기도 합니다. 중생심으로 보는 이에게는 재앙이 되고, 불보살의 마음으로 대하는 이에게는 복이 됩니다. 복이라고 할 성질이 없으므로 인연따라 세상 모든 일이 다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본래 복덕이라고 할 것이 없으므로 오히려 복덕이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복은 기다리는 것이 아닌, 받을 자가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모든 일이 다 복이 될 수 있으므로.

 

얻으려고 하면 아무리 많은 것을 받아도 부족하고, 주려는 마음을 내면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실제로 베풀 수 있는 조건이 이루어집니다. 얻는 것이 소원인 사람의 원이 성취되려면 남에게 도움을 얻을 만한 상황에 처해야만 합니다. 자꾸 얻으려고만 하면 자꾸 그만큼 불쌍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고, 자꾸 베풀려는 마음을 내면 베풀 수 있는 조건이 자꾸 다가옵니다. 얻으려는 소원이 성취된다는 것은 불쌍하고 도움 얻을 만한 처지가 된다는 것이니, 이런 중생심의 기도는 성취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복덕의 성품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은 이치를 알아야 합니다. 아무런 성품이 없으므로 인연에 따라 복의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재앙의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마음의 미혹이 사라지면 내 밖의 세계는 다 공한 법입니다. 그것이 내 것이라는 망념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움직여 흐르고 있을 뿐인 실상의 참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 실상을 아는 사람에게는 결코 내 것을 남에게 주었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받을 복이 있다는 생각도 일어날 여지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하나의 우리를 흐르고 있는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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